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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

[도서]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

디르크 그로서 저/프랑크 슐츠 그림/추미란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솔직한 이야기를 먼저하고 시작하고자 한다. 요즘 SNS를 보면 개나 고양이에 대한 무한 사랑이 넘치는 시대 같다. 그 와중에 나는 어떠한 동물에도 관심이 없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고, 지금은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을 때도 표지가 무척 귀엽군 하고 넘겼을 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불광출판사 서포터즈 불철주야가 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다! 그랬으면 이 좋은 영감을 주는 책을 몰랐을 테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 보길 바라고,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단순히 내가 보살펴야 하는, 할 일 리스트가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배울 게 많구나. 물론 저자의 말대로 대상이 ‘보바’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단, 주의할 점은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보바에게 정이 들었는지, 알고 있는 미래인데도 마지막 장에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중간에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던데 정말 감탄이… 글의 흐름이 초반에는 나처럼 관심 없거나, 선불교의 이야기가 힘들 사람들을 위해 유쾌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안에 자연스럽게 불교 이야기가 스며들어서 점점 익숙해진다. 사실 딱히 불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도와 선에 대한 이야기라고, 결국 우리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앞 부분에서 개에게 맞는 장면이나 더러운 방귀 이야기라던지 등은 불교나 선이 이렇게 유쾌함과 연결될 수 있구나 싶어 즐겁게 읽었다. 그러다 어느새 본격 삶과 나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는 진지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이가 놀랄 정도로 히끅 거리면서 읽고 있었다. 너무 집중하고 읽었더니 메모도 줄도 긋지 못하고 읽고 읽었다. 잘 살다 가야 할 길을 가는 개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슬플 일인가. 이런 흐름이 참 잘 구성된 것 같다.

 

  저자는 우연히 자기에게 온 영적 스승, ‘보바’를 만나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우리가 네 발 달린 스승으로부터 어떤 점들을 배울 수 있는지 알려준다. 마냥 사랑스럽고 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애완견이 아닌, 말 그대로 그들의 행동이나 모습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 개는 ‘전기톱을 가진 명상 스승’이다. (96)
  • 족첸 폰롭 린포체 :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학문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우리 정신이 어떻게 기능하며 우리 정신을 어떻게 수단과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천년 동안 꾸준히 연구되어온 학문입니다. (157)

먼저 정리부터 하자. 이 책의 가장 큰 소재는 두 가지, 개와 불교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의와 조금은 다르다. 전기톱을 들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말도 안 되는(?) 사상을 다 갈아엎는 스승인 개가 알려주는 학문으로서의 불교이다. 구세주가 따로 있는 종교가 아닌, 각자도생을 위한 정신 수양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불교. 이 부분을 먼저 염두하고 글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저자의 이런 시각이 책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 나의 네 발 달린 스승은 집중력, 자애, 떠나보내기, 순간에 살기, 열린 정신, 넓은 가슴, 무엇보다 조건 없는 사랑 같은 명상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구현해 보여주었다. 덕분에 내 영적 수행은 스승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되었다. 스승을 만나고 난 후부터 수행은 점점 더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고, 마침내 일상이 곧 수행이 되었다. (7)

 

  아둥바둥. 요즘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딱 이 단어로 맞아 떨어진다. 뭔가 해보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매달리고 있다.

  • 계획으로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고 다른 대안이 있음을 깨닫는 건 어떨까? 바로 삶이란 대안이다. 도가와 선불교가 지향했던 것이 바로 이 삶이었다. (중략) 자연의 그 어떤 것도 인간적인 사고에 빠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가에서 ‘무위’라고 했던, 행동 없는 행동을 할 뿐이다. (45)

그저 그 순간에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는 없었던 걸까. 지금 당장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싶으면, 특히 이 책이 읽고 싶으면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걸까? 근래에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 당장 이게 하고 싶은데 계획된 일정들로 인해 밀리니 언제나 하기 싫은 일을, 적어도 당장 하고 싶은 일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목적 지향적인 정신은 명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적 지향적인 정신은 현재의 순간이 충분치 않다 판단하고 바꾸려 애쓴다. 그래서 현재에 있지 못하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170)
  • 사와키 코도 : 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일이 첫날인 삶을 살면서 붓다와 경전의 가르침, 그 기본을 매일 새로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삶은 경계가 없으므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를 모방하지 않고 혹은 다른 이미 다 배웠다는 사람을 소환하지 않고 어떻게 온전히 스스로 발명하는 가이다. 스스로 창조하고 너만의 삶을 새롭게 발명하라. (206)

결국 내 모든 행동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런 행동과 행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모든 행동에 목적을 둬야 하는가? 심지어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왜 수행하려고 하는 건가? 명상을 하는 것도 많은 이들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더 잘 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명상하는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연히 명상하면 좋은 건가, 라는 생각으로. 단순히 모방하면서 그들이 이뤘던 성과를 위한 명상을 생각하지 않는가? 명상을 단순히 수단으로 생각하여,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명상을 명상자체로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보바의 막대기 후려침이 나에게도 필요한 것 같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는 이야기. 개는 그 어떤 사람도 평가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며, 편견 없는 호감을 보인다는 점이다.

  • 어느 시점이 되자 나도 어쩌다 내 손에 들어온 불교 책을 읽는 것보다는 길 가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더 주는 쪽이 연민과 자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56)
  • 네 발 달린 누군가가 다름 아닌 사랑 있는 보살임을 아는 사람은, 그 보살의 모범적인 삶 덕분에 누구보다 득을 보고 있던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보바를 관찰했고 보바를 통해 매 순간 드러나는 불완전한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간들의 인간적임에 대해, 그리고 인간들끼리, 혹은 개와 인간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친밀함에 대해 배웠다. (63)

사람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개들은 더하다. (물론 각 개체는 모두 다르니 아닌 개들도 있을 수 있다는 건 안다.) 저자는 보바와 함께 공원에 나가거나 주유소 일을 하면서 강제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바가 하는 친근함의 표현에 녹아 내렸고, 저자는 강제로 보바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점 책에서 나왔고, 자신의 방어막에서 나왔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있는 자신의 스승을 보며 사람 속에 있음을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나에게 가장 부러운 부분이었다. 사람들 속에서 불편함을 종종 느끼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줄 것 같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읽으면서 에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에크하르트 톨레를 많이 생각했는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해서 언급하는 걸 보니 두 저자가 맥이 닿지 않을까 싶다.

  • 우리는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태어난다. 모든 순간이 그 흔적이나 자취를 남기므로 우리는 매 순간 그 전 순간과는 다른 사람이다. 존재의 분명한 요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찾을 수도, 이름 붙일 수도 없다. ‘나’는 없고 무아, 즉 아나타만 있다. 무아이므로 방어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자유롭게 우리를 관통해 흐를 수 있다. 상처 입는 것은 특정 자아상을 갖는 에고뿐이다. (90)
  • 보바는 말 그대로 ‘아무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두가 될 수 있었다. 보바는 보호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바는 에고를 상상해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에고에 집착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유로웠다. (91)

나의 에고와 싸우고 있는 걸까? 나의 에고는 나를 어떻게 잠식하고 있을까? 보바처럼 자신이 보호하고 지켜야 할 에고가 전혀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에고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씩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건만. 불교의 진아와 무아를 그렇게 공부하고도 갈피를 못 잡는 걸 보면 보바와 같은 스승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눈 앞에 있는 걸 똑똑히 봐] 장에서 많이 멈추고, 많이 훌쩍거렸다.

  • ‘단지 전해 들었다고 해서, 그리고 전해 내려온다고 해서, 혹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어떤 가르침을 믿지 마라. 성스러운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혹은 논리적으로 그럴듯하다고 해서 믿지 마라. 꾸며진 이론들을 신뢰하지 마라. 그리고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해서 믿지도 마라. 개인적으로 좋게 느꼈다고 해서, 혹은 그 어떤 스승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당연한 듯 받아들이지 마라. 따라봤는데 불행과 고통이 생기고, 따라서 해롭다 깨달았다면 그 가르침은 버려야 한다. 따라봤는데 행복과 만족이 생기고, 따라서 이롭다 깨달았다면 그때는 받아들여야 한다.’ (146)

뭘 믿어야 하는가? 이는 온전히 개인의 영역이기에 누가 왈가불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기준은 있다. 행복과 만족이 생겨야 한다. 순간의 좋음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따르며 온전히 내게 넣을 수 있는 행복과 만족이 있어야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 요즘 여러 일을 겪으면서 힘들었던 건지, 많은 생각을 머무르게 했다. 너무 좋다고,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인데 그것조차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만족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그 안에서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만족이 있을 때에만 만족할 수 있다.

 

  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앨런 와츠 : 당신보다 더한 무엇, 당신과 다른 무엇, 혹은 당신보다 더 높은 무엇이 되고 싶다면 그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아직도 여기 말고 당신이 있어야 할 다른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환영 속에서 있음을 말해줄 뿐이다. (211)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다니. 나는 나 자신으로 이미 나 자신인데. 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거지, 내가 작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발전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일 수 있기 위해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 이 책이 주는 이 메시지가 가장 좋다.

 

 

* 출판사 서포터즈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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