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before you> is one of the most famous romance novels. Novels, especially romance, are not my liking, which I usually don’t think I need to read. It happened that I bought the book, unfortunately. There was no plan to read, but I had chance to read it with ‘Book_us’ members. I knew the rough story line. A love story between one guy who is disabled and one woman. But it was far more than I imagined.
At first I regarded Lou as Will’s rescuer. Lou tries to help Will to see lots of beauty in the world. At last, he would live a lively life. No. Definitely, it was not the case. It is Will who saves Lou. Lou is locked in an unconscious box. She doesn’t feel any difficulty in her life, but Will notices that Lou has something in herself. Something bigger than she thinks. Although in the beginning Will teases Lou a little, he eventually makes Lou see herself and find her own way of life.
The book <Me before you> gives many questions. What is love? What is life? What is living a life? How can we define who is alive or not? Of course, about euthanasia we should think about.
It’s a bit long story. But the story is not boring to read, and not much descriptions around the circumstances. The story flows smoothly and understandably. The author shows well how terrible one takes a nosedive, how suffocating to be a girl who has a family to take a responsible for or experiences something miserable during a blackout from drinking, how difficult to find one’s own life, and how dreadful to watch a loved one die. It’s really recommendable to anybody who doesn’t mind romance. If any, still. I had really good time.
(줄거리 전체 나옴)
로맨스소설을 잘 읽지 않지만, 원서로는 왠지 자주 접하게 된다. 어쩌다가 구매하게 된 이 책을 ‘북커스’에서 읽게 되었다. 너무 유명한 표지라 알고 있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책. 로맨스도, 슬픈 이야기도 싫어하는 사람이라 굳이 읽을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정말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는 책이었다. 단순히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안락사는 기본에 삶에 대해서도, 부모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자식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게 되는 책이라 정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을 정도.
서점에서 원서 도서를 훑어보면 이 책을 꼭 발견한다. 이렇게 유명한 책이라 대충 내용만 알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과 젊은 여성의 사랑이야기. 하지만 이런 설명은 이 책의 1/10도 나타내지 못한다. 이 책은 두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싶다. 첫 번째는 루이자. 루이자는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벌고 있기에 그 짐이 무겁다. 카페에서 6년동안 일하고, 한 남자와 7년을 만나는 등 표면적으로는 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루이자가 윌을 만나면서 자신의 세상을 넓혀간다.
일을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고, 간혹 펍에 가고, 아니면 집에서 티비만 보던 루이자는 윌을 만나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고민하고,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고려하게 된다. 이렇게 루이자의 성장에 초점을 두고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순히 일적으로만 윌을 대하던 루이자가 서서히 변한다. 처음 윌의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안락사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후반부에 나오는 루이자의 엄마의 모습과 동일하다. 어쩌면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안락사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삶을 끝내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 고민하고 행동하고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하고, 성장하고, 자신을 감추기 위해 들어갔던 무의식의 상자에서 나온다.
이런 게 바로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닐까?
- Here, I could hear my thoughts. I could almost hear my heartbeat. I realized, to my surprise, that I quite liked it. (89)
- “You cut yourself off from all sorts of experiences because you tell yourself you are ‘not that sort of person. (…) How do you know? You’ve done nothing, been nowhere. How do you have the faintest idea what kind of person you are?” (176)
어쩌면 루이자보다 훨씬 성숙하고 훨씬 많은 경험을 한 윌이기에 루이자를 잘 이끌어줬던 건지도 모른다. 안타까웠겠지.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상자 속에 갇혀 있는 루이자가 윌은 무척 안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제시하는 것들을 하면서 자신을 찾아가고 빛이 나는 루이자를 보면서 윌은 사고 이후 행복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효용성을 느낄 때 자신을 가치 있다고 느낀다. 자존감이 쌓이는 것이다. 사고 이후 휠체어에 갇혀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괴로웠지만 루이자를 만나 마지막을 행복한 기억을 갖고 떠날 수 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사랑이든 연민이든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상관없이 서로를 통해 루이자는 성장하고 윌은 비록 휠체어에 갇힌 몸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기뻐했을 것이다.
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사람이었다. 단호하고, 결단력 있고, 현명하고. 한쪽 손만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사지 마비 환자로서 휠체어에 갇혀 있던 윌. 사고 이전에는 외모, 재력, 성격까지 아무것도 빠지지 않았던 그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모두에게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그의 모습이 불쾌하기 보다는 안타까웠다. 얼마나 괴로울까.. 나라면.. 이라는 생각에 잠기면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 Nobody wants to hear that stuff. Nobody wants you to talk about being afraid, or in pain, or being scared of dying through some stupid random infection. Nobody wants to know how it feels to know you will never have sex again, never eat food you’ve made with your own hands again, never hold your own child. (274)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사고 후 2년동안 주변 모두가 그를 힘들게 했다. 이미 충분히 힘든 윌이었는데,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윌에게 좋을 거라는 결정들을 마음대로 내렸다. 윌은 그게 더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운데 삶의 결정권자가 타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그 와중에 내 일을 타인이 멋대로 결정하고 나에게 강요한다. 심지어 동의한 적 없는 일들을 말이다.
- Everyone thinks they know what I need. (63)
- But you didn’t bother to ask me. You decided what you thought you’d like me to do, and you went ahead and did it. You did what everyone else does. You decided for me. (171)
그래서 루이자가 자기 마음대로 여러 일을 벌렸을 때 윌은 루이자에게 실망한다. 루이자만은 그러지 않길 바랐던 윌인지도 모르겠다.
안락사를 무조건 반대할 순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는 게 죽기보다 괴로운 사람들이 있다. 살다보면 희망이 있고 빛이 있을 수 있다고 강요하는 건 그들에게 더 큰 괴로움을 던져주는 것이다. 네이슨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윌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해서일 것이다.
- But I want him to live if he wants to live. If he doesn’t, then by forcing him to carry on, you, me ? no matter how much we love him ? we become just another shitty bunch of people taking away his choices. (339)
- It’s not enough for me. This ? my world ? even with you in it. And believe me, Clark, my whole life has changed for the better since you came. But it’s not enough for me. It’s not the life I want. (370)
- This is the first thing I’ve been in control of since the accident. (397)
처음부터 사지에 문제가 있는 사람과 그 누구보다 활동적이었고 자신의 삶을 진취적으로 개척하면서 살던 사람의 변환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저 사람이 잘 살고 있으니 너도 살아야 한다는 건 폭력이나 다름없다. 온전히 그 사람이 아닌 이상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아닌 것이다. 윌이 조금만 더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컸다면 달랐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자신이 생각하고 움직였던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고통에 미칠 것 같은 자신의 삶을 그 누가 계속 영위하고 싶어 할까. 자신의 삶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때 말이다. 내가 비관론자라 더 어두운 면을 보는 것 같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질 부분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고통과 괴로움만이 점철된 인생이 그려지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윌의 엄마 카밀라의 입장도 너무 이해 된다.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 내 아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모른 척하며 좋은 면을 강조하며 삶을 지속하라고 애원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지만, 그 생각을 강요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놓아줄 자신도 없을 것 같다. 자식 앞세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는가. 평생 피멍든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 ‘돈’이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고, 생명의 존엄에 걸린 문제를 다루다 보니 어쩌면 덜 부각되는 듯한 ‘돈’. 저자는 돈이 행복과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 살게 되면 다 부질없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나는 돈 많은 윌의 가족을 보면서 그래도 돈이 많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가난한 사람은 아플 때 더 서럽다. 돈이 없는 집에서 윌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병원비를 충당하지 못해, 제대로 의료 처치도 못하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를 도와줄 좋은 의료진을 구하지도 못하고 장비도 구하지 못해 더 크고 빈번한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윌만큼 돈이 없었다면 더 힘든 시간을 참아야 하는 건 명백하다. 심지어 돈을 써서 루이자나 네이슨 같은 사람을 쓸 수 있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가족 중에 한 명이 간병을 하기 위해 옆에 있어야 한다면 여전히 재정적인 문제가 지속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하루종일 방치되어야만 했다. 심지어 이렇게 안락사, 존엄사 할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었을 지도. 비참하게 자살하는 결말을 맞을 지도 모른다. 자살도 못했을 수도.
윌이 루이자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소하게는 루이자에게 책을 지속적으로 선물하는 것부터 훗날 루이자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아빠를 취직시킨다. 죽은 뒤 거금의 유산을 남기기도 하고.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돈이 있다면 그 역할에서 조금이라도 수월해 질 수 있고, 많은 걱정 거리들을 없앨 수도 있다.
그래, 돈 벌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