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깨달았습니다.
순례길이 바로 우리 인생길과 같다는 것을요.
꼭 필요한 것들만 갖고 살아도 되고,
필요한 것들은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음을 말입니다.
버릴수록 짐은 가벼워졌고, 더 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잘 걸을수록 에너지는 내부로 향했고,
순례길의 본래 목적인 "나"를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p.40)
사실 이 책은 마흔에 관한 책인지도 모르고 집어들었다.
표지가 너무 예뻐서, 그리고 제목이 너무 끌려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저 말에 공감하지 않을수가 없으리.
"담요와 책이 있다면" . 적어도 나는 다섯시간은 가만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이름이 낯설어 검색을 했더니 유명한 독서교육자였다.
이 점에서 사실 잠시 주춤했다.
교육자들의 책이 대부분 가르치는 말투라서, 약간 거부감이 있었기때문.
하지만 걱정마시라. 가르치는 말투의 책이 전혀아니다.
소근소근, 차를 마시는 듯한 느낌의 책이니 말이다.
그리고 각 이야기마다 책을 한두권씩 소개해준다.
나는 이미 읽은 책도 있었고 그렇지않은 책도 있어서,
당분간은 무엇을 읽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든다.
(하긴 평소에도 읽을 책을 쌓아놓는 편이지만)
이 책에는 60여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구절구절을 어찌나 잘 엮었는지 놀라움이 들 정도다.
그 이야기들을 굵직히 다섯이야기로 나누는데, 그 소제목들도 어찌나 멋진지!
소제목들을 소개하기 위해, 그 순서로 리뷰를 써볼까한다.
또 이 책에 가득한 멋진 일러스트도 소개하고.
비로소 삶의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 내 마음 속 그림자 이해하기
이 챕터에 상단에 옮겨쓴 말이 나온다. 산티에고 이야기.
나도 산티에고를 한번쯤 걷는게 목표처럼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어느날 내 아버지가 말했다.
"순례자의 길을 걷고 싶은건지, 마음을 다지고 싶은지 모르겠으나
걸으며 마음을 다지는 건 산티에고에 가지않아도 돼.
뒷동산을 걸어도 니가 마음을 잡으면 그게 산티에고지" 하고.
나는 그때 또한번 아빠의 지혜에 놀라움을 느꼈었다.
이 책에서도 말한다.
버려야할 것들은 반드시 물건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p.42)
나는 이 말이 아빠의 말과 일맥상통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마음의 문제라는 것.
그래, 맞다. 우리는 때로 잊고살지만 그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저자의 말처럼 타인을 염려하고 사랑한다고 전달하고자
우리는 타인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결국 내 마음의 그림자를 이해하는 것은 내게 달렸다.
그녀가 굳이 어두움이나 다른 어떤 게 아닌 그림자라고 쓴 것은
분명 버릴려야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겠지.
내 그림자를 버릴 수 없듯, 내 속의 그림자도 버릴 수 없으니
음영이나 길이를 조절하는 것 역시 나뿐이라는 것도 받아들여야한다.
정확히 아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모든 걸 능가하는 "나로도 충분한 마음"
- 흔들리지 않는 중년
첫번째 이야기에서부터 나를 울린 이 챕터.
사실 제목부터 난 울준비가 되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로도 충분한 마음"이라니.
사실 우리가 가장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 자신 아닐까.
나에게는 유독 더 강한 잣대를 들이대고 비교한다.
그 비교가 과거의 나라면 발전적이겠지만,
언제나 비교는 타인과 하며, 스스로를 짖누른다.
결국 인간이 가장 행복한 수난은 사랑하느 이들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것이니까요.
행복은 열심히 일한 후 그 대가로 얻어지는 게 아니고
지금 이순간에 일하고 존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p.77)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다. 진짜 행복은 무엇이냐고.
아마 대부분은 그 말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겟지만
막연하게는 아마 이게 행복이겠지- 하는 게 있을테다.
나도 뭔가 정확히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몇가지, 이게 행복이다- 싶은 상황들을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보다 부정적인 것을 먼저 떠올릴 뿐이겠지만.
함께해야 할때와 분리되어야 할 때를 알게 되다
- 나타인과 나 사이에 필요한 틈 이해하기
이 챕터에서는 한 이야기의 제목을 먼저 거론하고 싶다.
어디에서가 아닌 누구와의 프레임으로.
대한민국은 어디에 프레임에 갖혀산다고 한다.
어느 대학, 어느 직장, 어느 아파트, 어느 차, 어느 식당...
다 거론하기도 민망한게,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에 일고십을 두고, 2018년 큰 수확이란 말을 썼다.
그 말에는 사실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대학, 어느 직장, 어느 곳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도
"책"이라는 매개로 연결이 되고, 대화가 되는구나-하고.
실제 모임을 하며 직업을 할게 된 분도 있고, 지역은 거의 다 알게되었지만
그것들을 먼저 안것과, 사람을 먼저 안 것은 엄청 난 차이가 있다.
난 어쩌면 일고십을 통해,
내가 가진 선입견 프레임을 하나 벗은 걸지도 모른다.
또 몇몇 분들이 일년 내내 내 일기를 읽어주셨는데
일기를 통해 나를 더 알게 됨은 당연했지만
어떤 분은 내 일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 말은 묘하고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온 한 구절 덕분에 묘함은 지워낼 수 있었다.
일기를 쓰는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마구 써내려가지만
다 쓴 일기를 읽어내려가면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 자신이 겪은 속상한 일을
한 사람의 독자가 되어 읽어보는 것입니다. (p.122)
아마도 그 분은 내 일기를 읽고 계셨으나, 본인 마음도 함께 읽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감동을 내가 드린 건지, 아닌지 따질 길이 없다.
삶은 결국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
- 외롭지않은 연대하는 중년되기
이 챕터를 읽으며 나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얻었다. 바로 "연대감수성".
단어로는 무슨 말인가 싶을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쉽다.
가령 독서모임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왜 독서모임을 하는가?
글씨를 몰라서? 책을 좋은 걸 못 골라서? 같이 읽어야 재밌어서?
그래, 무엇이든 그 바탕에는
"같이 읽으므로해서 같은 걸 느끼고, 다른 건 배울 수 있어서" 일 것이다.
결국 "연대감"이 바탕이 되면 수고로움도 수고롭지않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공감까지 더해진다면 연대감은 증폭될 것이다.
그 연대감이나 공감이 서지않은 사람? 그건 자연히 걸러진다.
그러니 연대를 가지지못한 사람에게까지
공감하고 경청하려고 내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지는 말자.
아마 사람은 살면서 "좋은 사람과 좋지않은 사람을 거르는 계기"를 만난다.
나같은 경우에는 취업을 해서 한번, 결혼하고 한번,
아이를 낳고 아주 크게 한번 사람들을 거르게 되었다.
아마 나도 누군가에게는 걸러지기도 했을테고, 거르고 걸러도 남기도 했을테다.
학창시절에는 그 누구에게도 걸러지지않기를 바랬다면
이제는 안다. 남이 나를 거르는 것은 크게 의미있지않다는 것을.
내가 거르고 남은 사람만 만나기에도 인생이 짧고,
거르고 남은 일만 하기에도 세상은 벅차다.
그러니 사소한 것에 목숨걸지말고, "거르고 남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자.
저자의 말처럼, 삶은 결국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일테니말이다.
흠집이 난다해도 멋스럽게 남기기로 했다
- 이제까지와 다른 새로운 삶 준비하기
어느새 마지막 장을 정리해야 할때가 왔다.
이 페이지를 정리하며, 이 말만큼은 반드시 옮겨두고 싶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이 살아숨쉬는 생명의 공간이 되려면
그 노동에 희망이라는 가치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은 메마르고 건조하며 쉽게 지치지요.
(...) 우리가 희망을 품고 매일 기쁘게 일을 한다면
그것은 책 속의 엘제아르가 매일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꾼 것과 같은 행위가 됩니다.
말이 쉽지 희망을 품는 일이 그리 쉬운가, 하는 생각이 드는가?
우리가 나무를 이야기하면 누구든 꼭 입에 올리는 말이 있다.
지구가 멸망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 말을 우리가 놀리듯 사용하는 이유는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내게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 그러면 바꾸어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사과만 먹을 뿐, 다른것은 아무것도 못 먹는 병이다.
그런데 세상의 사과나무는 모두 죽었고, 사다놓은 사과는 곧 다먹을테다.
내가 가진 이 사과나무만이 유일한 사과나무.
지금도 사과나무가 의미가 없어보이는가?
아마 큰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미 바뀌었을테다.
우리가 살며 분명 마음에도 상처가 날 것이다.
마음도 늙을것이고, 마음도 늙고 병들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다.
상처 받아서 주저앉아 버릴텐지, 그럼에도 일어날텐지.
나는 후자의 삶을 살 것이다.
지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다시 내 삶을 살아내는.
욕심낼필요도 없다. 하루에 딱 하루만큼만 힘을 내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그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될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