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도시 이야기>에서 파리의 극단적인 귀족과 하층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 귀족들의 잔인성을 마차에 치여 아기가 죽고 말았던 이야기로 그리기도 하지요.
- 마차들은 으레 사람을 덮치고도 다친 사람을 그냥 버려두고 떠났으니까. 안 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158)
생명의 존귀함을 논하여 우리는 귀족의 행태를 비난합니다. 그 당시 귀족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들과 하층민을 아예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로 그들을 ‘당연히’ 비난할 수 있습니까?
누구나 법앞에 평등하고, 존귀하다.
우리 보두가 아는 말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모르는 말 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미처보지 못했던 내용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생각지도 않았던 문장이 보이기도 하고,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최근 현대판 귀족일지 모를 재벌가에 마약 바람이 불고 있다.
자신들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분류라 생각했던 걸까.
본인의 쾌락이라면 법도, 인권도 없다고 생각해왔던걸까.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삶" 자체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저 그들의 행위만을 비난할 수 있을 뿐.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죄를 옹호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은
어쩌면 그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어제 읽은 책에서처럼,
세상이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인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벌"을 달게 받고
스스로 속죄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랄 뿐이다.
자, 다시 결론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우리조차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단지 그들의 죄를 비난할 이유는 있다.
그들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를 단 한번이라도 무시했다면.
2.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가장 큰 주제는 아마 연좌제가 아닐까 합니다. 찰스 다네이이자 시몽 에브레몽드는 자신의 귀족이라는 지위에 환멸을 느끼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윗대에서 했던 악마적인 행위로 인해 죽음을 대가로 치뤄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되죠.
- 선생님, 전 이 아이를 위해서 속죄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는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아도 절대 번창할 수 없을 거예요. 다른 누구라도 이 잘못에 대해 속죄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 아이가 죗값을 치러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제게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좀 있습니다. 보석 몇 가지밖에 안 되지만 만약 그 여동생을 찾을 수만 있으면, 제가 죽더라도 이 아이로 하여금, 어미의 동정과 슬픔을 잊지 않고 그 재산으로 불행한 가족에게 배상을 함으로써 죗값을 갚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471)
그의 엄마는 아이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그에게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그리고 그 윗대의 일들을 속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는 한 번은 타당한 이유로 살아남았지만, 마담 드파르주의 복수로 인해 결국 사형을 선고 받게 되지요. 그런 그의 운명은 인과응보일까요?
엄마가 내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돌려받는다고. 반드시 돌려받는 때가 온다고.
예전에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남에게 좋게 한 끝도, 나쁘게 한 끝도 결국에는 돌아온다.
물론 드파르주의 방식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속죄하지않으면 죗값을 치루게 되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3. 파리의 시민들은 결국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귀족들을 몰아내고 서서히 나라 전체를 점령해나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나 갈구하던 자유, 평등, 박애를 얻게 되지요.
- 만약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좋은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덜 굶주리고 덜 고생한다면, 그 애가 오래 살 수 있을텐데.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텐데. (532)
하지만 그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런 사상이 아닌 기요틴인 듯합니다. 어제와, 오늘의 피가 섞이고, 내일의 피까지 준비되어 있다는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시피 매일같이 그들은 희생물이 필요했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일까요?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무차별적인 ‘살인’은 응당 치뤄야만 하는 대가일까요?
언제인가 한 책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혁명이 성공한 것은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을 읽은 적 있다.
이 말을 이 책의 리뷰에도 인용했는데,
사실 내가 두도시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이 치루는 살인은 치뤄야만하는 대가는 아니다.
감정에 휩쓸리고, 대중에 이끌린 "집단 광기"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얻어낸 것이 진정한 자유고 진정한 권리일까?
분명 시간이 흐르면 그 과정은 다시 아픔을 낳기 마련이다.
단체의 힘이라는 단어로 묶어버린 집단 광기는 어쩌면
또 다른 소수의 아픔을 꾹꾹 덮어버린 일이었을지도 모름을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