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쓰인 ‘꼼짝도 하기 싫은’은 ‘폐허가 된 사람의 마음 상태’다. 현재 내 마음도 그래서 나는 절박하게 이 책을 따라갔다.
소설, 에세이, 르포르타주 등 여러 장르의 경계를 혼합하는 그의 글쓰기 특징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의 창작이 슬며시 끼어드는 장면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우리는 화려한 도시로 떠올리지만 그곳을 유명하게 만드는 건 폐허의 유적물인 로마에서 그는 프로이트 『문명 속 불만』을 떠올린다. 로마는 도시가 아니라 “그 역시 오래되고 풍성한 역사를 지닌 하나의 정신적 실체”이고, “르네상스 이후 지난 몇 세기 동안 거대도시로 성장한 로마의 뒤죽박죽된 건물들 사이에서 폐허가 되어버렸다.” 실체는 매우 희박하지만 정신 영역에서는 완강한 그것. 마음의 폐허 상태에서 우리가 버티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을까. 기억, 희망, 사랑 그런 추상적인 것들. 가까이 있으면서도 특정 사람 외엔 접근할 수 없는 감옥, 영화배우 같은 그와 그녀가 있는 로마의 산 칼리스토는 그래서 유토피아처럼 그려진다. 이곳의 하늘은 헨리 제임스의 여행 에세이 『이탈리아의 시간들 Ⅰ』 의 문장 “산산이 조각난 전통처럼 파란 하늘” 같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필름이 없는 슈퍼 8밀리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상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제프는 교통 법규 위반으로 경찰에게 울면서 호소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스비극처럼,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모습은 담담하게 묘사한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폐허” 상태였으므로.
“당시에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가 어떤 전환점이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반응, 즉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 어느 지점에서는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지적인 훈련과 야망들이, 심드렁했던 약물남용과 나태함, 그리고 실망감 때문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 나에게는 목적도 방향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삼십 대 때보다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 것, 나 스스로 빠른 속도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ㅡ <쇠락과 몰락 - 로마 사람들의 연극하듯 사는 삶> 중
그의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기 위한 관광이 아니다. ‘폐허’로서 ‘폐허’를 마주하기라고 할까.
“렙티스에 가기 전에 그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바라보는 것,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뿐이었다. 눈은 저절로 거기에 익숙해질 터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우울한 체념 상태에서 그때까지 겪은 리비아에서의 경험을 적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책상 앞 거울에 비친 내 모습까지, 끔찍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흰머리, 툭 튀어나온 코, 비쩍 마른 목까지 그대로 옮겨 적었다. 종종 내 외모에 실망하는 순간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 나 자신이 역겨워 보인 적은 없었다. 내 인생에서 있었던 모든 비극들이 갑자기 얼굴 위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항상 보고 있는 나의 모습(내 생각과 달리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그 모습)을 나도 우연히 흘긋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예언이 실현되는 중이었다. 거울 안의 얼굴이 말했다.
“인생이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거야. 숨기고 싶었던 모든 실망과 후회, 모든 쓰라림과 분노가 이제 폭발하듯 튀어나와, 그나마 남아 있던 보기 좋은 면과 희망의 마지막 조각을 지워내고 있는 거라고. 몸이 끌리는 것들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며 지냈던 사람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 이제 너도 그런 사람들, 너와는 인상이 다르다며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 수백 명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거야.”
ㅡ <렙티스 마그나 - 폐허의 초기 단계> 중
그는 이 원인을 중년이 된 나이 탓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그것은 빨리 얻고자 하는 하나의 답일 뿐이었다. “물건이 부서진 후에도 계속 쓰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를 좋아한다”면서 자신을 그렇게 여기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마음도 있었겠지만. 과거의 꿈의 공간 같은 ‘구역’을 찾는 그는 폐허로 외로움으로 계속 이동한다. 그것은 수평적인 마음이다.
“어쩌면 고대 유적에서 배우는 가장 간단한 교훈은, 뭐든 수직으로 세운 것은, 그게 도리아식이든, 이오니아식이든, 코린트식이든 상관없이, 훗날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수평적인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늘이나 바다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선 고대 수직 기둥들에 더 큰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배경의 관점, 그러니까 바다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렙티스는 폐허의 초기 단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언젠가는 남은 유적들이 모두 사라져 사막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평선을 방해하는 수직 기둥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공간의 최후의 승리일 것이다.”
ㅡ <렙티스 마그나 - 폐허의 초기 단계> 중
뉴올리언스 슬럼가 체류는 타란티노 영화 <펄프 픽션>처럼 지나갔고(<수평선 상의 이동 - 미시시피 강의 지루하게 움직이는 도시>), 태국의 성지이자 휴양지에서 그들은 요가나 마음 수련, 글쓰기보다 약물이나 자학적인 고행, 섹스에 빠지기 일쑤였다(<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귀찮아서 쓰지 못한 자기계발서>). 암스테르담에서 친구가 연 근사한 파티는 잠깐이고 “그냥 퍼질러 앉아서 지나온 인생 전부를, 한순간 한순간을 아쉬워해야 할 것만” 같이 좋지 않은 날씨와 약물과 방황이 하루 가득이다(<호텔 오블리비언 - 암스테르담의 기억나지 않는 행복>). 인도네시아 우붓에서는 풍경이 아니라 공놀이에 빠진다.
“그렇게 강한 공을 손바닥으로 받는 일에는 뭔가 깊은 만족감이 있다. 왼손으로 있는 힘껏 다시 공을 던졌다. 그레고르가 얼굴 바로 옆에서 공을 잡았다. 그가 다시 공을 던지고 나는 몸을 살짝 앞으로 숙여(정확하게) 왼손으로 잡았다. 그레고르는 내가 릴케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알고 그의 시를 인용했다. “아, 우리가 용기를 내어 무한한 공간으로 던졌던 공,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올 때는 다른 느낌이구나. 자신이 지나온 공간의 무게로 더욱 무거워졌구나.”[릴케의 시 〈비둘기, 여전히 밖에 있는〉 중]
그레고르의 뒤로 협곡이, 무한한 경계가 놓여 있었다. 공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오가는 노란 행성이었다. 우리는 던지고 받는 일에 취해 있었다.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었겠지만 언제 끝이 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공놀이는 영원히 지속되고 있었다.”
ㅡ <무한한 경계 - 발리에서의 영원한 공놀이> 중
캄보디아에서는 하루 종일 제자리를 맴도는 배를 타거나 석양을 기다리는 게 일이다. 어느 아이에게서 콜라를 사야 하는 지도 고민거리다.
“페소아[포르투갈의 시인]가 옳았다. 석양을 보기 위해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이유는 없다. 석양은 세계 어디에서든 똑같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간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과 프놈바켕에 가고, 전 세계 어디든 가서 석양을 본다. 사실 여행을 할 때 석양은 다른 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목적과 의미를 가져다준다. 그렇다고 해도 석양을 기다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석양을 기다리는 일이 하나의 활동이 된다. 정지 중인 운동이라고 할까. 게으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수준의 일로 격상된다. 석양에 대한 기대 역시 노력으로 유지해야 한다. 어쨌든 일어날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셈이다. 아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프랭크 오하라[미국의 시인] 역시 옳았다. “해가 늘 지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해는 그냥 사라진다.” 그렇다면 석양은 언제 지는 걸까? 이 점에 대해서는 오든이 정확히 지적했다.
괴테가 깔끔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석양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십오 분 이상은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석양을 바라보기만 할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내 생각은 그랬다.”
ㅡ <미스 캄보디아 - 석양을 기다리는 게으름> 중
도시에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강력한 풍경이다. 베르사체가 총을 맞아 유명해진 명소도 베르사체 때문에 그러하다. 도시라는 공간은 기묘해서 사람들이 자살하는 원인을 더위나 아르데코 양식 때문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할 수도 있다.
“사우스비치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발코니에서 투신한 자리를 찾아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
“다시 보니 투신을 한 할머니는 대단히 사려가 깊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일부러 보도에서 조금 떨어진, 정원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자리를 골라 그리고 떨어진 것이다. 길가의 다른 물건들 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핏자국이나 땅이 꺼진 흔적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둘이서 호텔을 더 구경하고 스무디를 더 마셨다. 오후에는 군중들 사이로 다리를 절며 지나가는 할머니, 젊은이들의 멋지게 태운 매끈한 몸, 약에 취한 마약쟁이, 문신을 새긴 채 블레이드를 타는 사람들, 단백질 보충제와 근육 강화제를 통해 잔뜩 몸을 만들어놓은 동성연애자, 날씬한 몸매를 위해 샐러드만 먹을 것 같은 아가씨 들을 보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르데코는 껍데기뿐인 화려함 뒤의 절망 또는 사람들을 자살로 이끄는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자극이었다. 군중들 사이로 지나가던 할머니의 끈기는 특히 존경스러웠다. 관절염에 걸린 한쪽 발을 열심히 다른 발 앞으로 내딛는 그 모습. 내 옆을 지나던 할머니는 갑자기 앞으로 푹 고꾸라지며(무릎에 힘이 빠졌을 것이다) 거의 넘어질 뻔했다. 다시 균형을 잡은 할머니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바로 그 순간 나는 그 할머니가 그 전날에 본 할머니, 보도 옆에 쓰러져 있던 할머니와 같은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빨리 기운을 차리신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양말을 보고 그 할머니인 줄 알았다. 지저분하지만 피는 묻지 않은 그 흰색 양말을 보고 그 할머니인 줄 알았다. 지저분하지만 피는 묻지 않은 그 흰색 양말을 보고.”
ㅡ <아르데코의 절망 - 시체를 보는 관점> 중
고대 폐허도 디트로이트 같은 최신 폐허도 내 맘의 폐허를 압도하지 못한다.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안에서 내리는 비가 그칠 때이다.
“아무것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아무것도 확실히 내 마음을 잡아주지 못했다. 밖에 있으면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고 실내에 있을 때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가장 심할 때는 일단 좀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인생을 허비했다.”
“블레이크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성지에 있었던 그의 시 전집에서 본 구절이었다. “지혜는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는 버려진 상점에서만 살 수 있다.” 하지만 조지스 마켓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늘 사람들이 오가며 현금을 내고 알코올 도수가 100도쯤 되는 지혜를 한 병씩 샀다. 다만 그들이 얻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잊힌 사촌쯤 되는 망각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모든 것 아래 망각의 욕망이 흐른다.’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다 모닥불에 손을 녹이는 다른 남자를 보았다(추운 날은 아니었지만, 버려진 채 지내는 시간이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몸을 덥히게 된다). 나의 말년이 그 두 사람과 비슷해진다고 해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두 노인과 나를 구별해주는 건 뭐였을까? 모든 것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분명 내게는 렌터카가 있어서 언제든 호화로운 폰차트레인 호텔이나 공항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 공항에서 가능성만 놓고 말하면 하늘 아래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나 마음의 상태까지 고려해서 비교한다면 누가 더 낫다고 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도심 속의 황야인 브러시 공원에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리어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사이에 뭐가 더 낫고 어쩌고 할 게 없는 것 같았다. 행복함을 느끼는 능력 말고 인생을 판단할 기준이 뭐가 더 있을까? “그들은 뭘 바라는 걸까요? 구역을 찾는 사람들 말입니다”라고 영화 〈스토커〉의 작가는 묻는다. “행복이지요. 그 무엇보다도.” 스토커가 대답한다. 어떤 사람들이 구역에 들어갈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착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이요”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두 노인이나 나나 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대충 같은 셈이다. 거기 앉아서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잠시나마 행복한 마음이 스쳤던 게 차이일 뿐이지만, 그 행복감은 겨울날에 잠깐 비치는 햇빛 같은 것에 불과했다. 햇빛 밖으로 나가면 다시 살을 에는 추위가 느껴져 몸을 녹이려면(모두 빙 둘러서서) 모닥불에 손을 쬐는 수밖에 없다. 잠깐 빛나는 행복의 표면 아래에는 절망이라는 차가운 지형이(아주 밀도가 높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도로에서, 버려진 공장 건물들에 둘러싸인 채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 앞에 기꺼이 차를 세우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걸음을 멈추니 시간도 평소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장면이 영화 속 장면이나 사진처럼 보였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 멀리 이어진 철로를 보면 거기 몇 년 전에 지나간 마지막 기차의 모습과 기차가 지나간 후 녹이 슬어가는 선로가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보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멀리까지 보지는 않았다. 시간도 기차처럼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 점이 이 적막한 장소가 흡인력을 가지는 이유였다. 그 흡인력을 감지하고 차를 멈춘 사람이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내가 타고 온 차의 바퀴 바로 앞에 작은 담배꽁초 더미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차에 있는 재떨이를 거기서 비운 게 분명했다.
기분이 급격히 나아졌다.”
ㅡ <안에 내리는 비 - 디트로이트에서만 쓸 수 있는 책> 중
블랙록시티의 묘사는 마치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는 인간의 은유 같다.
“블랙록시티에는 축제 기간 동안 약 2만 5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일 년의 51주 동안 블랙록 사막을 항공사진으로 찍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비바람을 제외하면 몇 천만 년째 거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만큼 틀린 말도 없다. 그런데 일 년에 일주일만 바로 그 텅 빈 지역에 조명의 양이나 화려함에서는 라스베이거스에 뒤지지 않는 도시가 들어선다. 일 년에 일주일 동안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 하나처럼 환상적인 곳이 된다. 그런 다음 사라진다. 다시 황량한 사막만이 끝없이 펼쳐진다. 도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흔적은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에 담겨 전 세계로 흩어진다.
블랙록시티는 종종 한시적 자치구로 불리기도 한다. 하킴 베이가 제안한 전복적인 개념인 한시적 자치구, 즉 “국가와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는 봉기, 어떤 영역(땅, 시간, 그리고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게릴라 작전을 펼치고, 국가가 나서서 진압하기 전에 재빨리 정리하고 다른 곳?다른 장소에서 다시 하는 것”을 가장 열광적으로 실현한 곳이 바로 블랙록시티다. 버닝맨에 적어놓은 “세상에 없는 곳Nowhere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는 은연중에 다른 두 단어를 암시한다. 그건 ‘지금Now’-‘여기here’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로버트 스톤의 〈다마스커스 게이트〉에 나오는 한 인물은 자신은 무엇을 믿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해방을 믿어요. 저한테 해방이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능하겠죠.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해방될 때까지 저의 해방은 미뤄두려고 해요.” 베이는 이런 종류의 변증법적인 연기延期를 경멸했다. “‘다른 사람들(혹은 감각을 지닌 모든 생명체)이 모두 자유로워진 다음에야 본인이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은 열반의 황홀경 안에 숨겠다는 것, 우리의 인간적 면모를 포기하고, 우리 스스로를 패배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약간의 사람들이 때때로 해방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금.”
ㅡ <구역 -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곳> 중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내가 독재하는 ‘나’라는 국가를 좀 더 자유로운 자치구로 만들 수는 없을까. “여기서 지금.” 인간은 그것이 잘 안되기 때문에 온갖 곳을 다니고 페인트 축제로 서로에게 물감을 퍼붓고 인형을 태우고 하는 실정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스토커>에서 ‘구역’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욕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은 바로 여기, 지금, 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자기 수양을 뜻하는 '요가'라는 단어로 문을 닫는다.
“릴케는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에서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꾸짖었다. 시 사차날라이의 불상들은 아무도 꾸짖지 않았지만, 그걸 보고 있으니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 때문에 바뀐다”라는 브로드스키[러시아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의 문장이 떠올랐다. 오든이 여러 차례 적은 바 있는 말을 브로드스키가 의식적으로 살짝 바꾼 것이다. 1933년 오든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바뀐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1940년의 신년 편지에서는 “우리가 바꾸어놓은 것들이 다시 우리를 바꾼다”라고 보충했고, 그로부터 십 년 후 〈이동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하게 적었다.
어딘가 우리가 진정으로 다녀온 곳이 있어,
고귀한 장소들
우리가 기억하는 행동들, 얼굴들, 장면들
변하지 않는 것들, 우리가 바뀌었으므로······ ”
ㅡ <구역 -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곳>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