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에 이렇게 많은 계절이 빼곡히 담긴 책도 없을 거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20대였던 1969년부터 1988년 40대까지 감옥에서 보낸 편지. 세상에는 감옥에서 쓴 글이 많지만 저자에 따라 그 느낌은 상당히 다른데 신영복 선생의 글은 빼어난 아름다움이 있다. 선생의 근사한 필체와 그림까지 곁들여 있어 더 그렇다. 감옥의 질곡에서 몸과 마음의 주권을 단련한 한 사람의 이 오랜 기록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물질의 운동양식이라면 나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바위처럼 풍화당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칭 옥살이라는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게 표출되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궁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또 요구를 낳으며 그 요구가 관철되기 위하여는 크고 작은 투쟁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판이다.
그런데 그 요구의 질과 양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일광욕 투쟁, 용변투쟁, 치료, 식수……. 바깥 세상에서는 관심 밖의 것들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궁핍과 제한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생존에 불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囚人)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듬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곧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
ㅡ「고독한 풍화(風化)」,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1969년 1월~1970년 9월 기록 중
유형 생활과 사형 직전에서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그 영향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는 감옥 생활과 죄수들의 해학을 면밀히 담았는가 하면 한 사람 한 사람 허투루 담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과 『수용소군도』,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기록을 담은 프리모 레비의 책 등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참혹한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내내 숙고하게 된다. 신영복 선생의 이 편지들에서도 그것은 내내 떠나지 않는 화두이다. 수형생활의 특성상 동일한 문제를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 생각하고 타인에게 글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더 다듬었으니 그것을 읽는 사람은 가볍게 읽고 지나치지 않게 된다.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일순 평등해지고 서로의 민낯과 습관 전반을 함께 경험하는 감옥 생활은 비극적이면서 생활의 발견을 하게 만든다.
뽑은 이라도 감옥을 벗어나게 하려던 행동. 고양이, 새, 곤충, 마늘 한 쪽 등 각종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 교도소 인근 묘지 방문자들에 대한 관찰과 난상 토론. 잠에서도 징역을 사는 꿈. 전망 없는 창문과 살다 보니 봄가을이 없다시피 한 교도소의 하하동동(夏夏冬冬) 계절. 서로를 37℃의 열 덩어리로 느끼게 되는 여름 잠자리의 증오. 더위에 지친 동료들을 위해 방 가운데서 부채질을 하는 인정. 이재민의 재난과 불행까지 포함해서 ‘바깥의 삶’ 그 자체가 동경이 되는 삶. 교도소에 나타난 황소를 보고 고향을 떠올리는 그리움. 가족에 대한 불안과 고마움……. 선생의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책을 덮고 당장 나가고 싶었다. 내 앞에 펼쳐진 하늘과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기쁨이 내게 주어져 있는데 이걸 무심히 흘려버리고 있다는 안달 때문이었다. 선생은 오죽했을까. 형기 십 년을 훌쩍 넘었을 때 선생이 정약용의 18년 유배 생활 글을 읽는 심정은 또 어떠했을지.
이 책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라 사려 깊은 가족애를 보는 것도 남다르다.
형의 결혼에 대해 불만을 가진 동생에게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당부. 동생이 반려자를 맞을 때는 ”사람이란 사과와 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반려이며 생활을 통하여 동화·형성되어 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면밀한 선택으로부터 좀 대범해져도 좋을“ 것이라는 충고. 지식과 실천의 조화를 다짐하는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어머니의 사랑을 거듭 절감하며 자신의 글씨에서 어머니의 글씨체도 담겨 있다는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수, 계수와도 교우를 나누는 편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소풍에서 우연히 만난 꼬마들과 계속 교우를 나눴던 「청구회 추억」이다. 선생이 체포되어 흩어지게 된 사연이 가슴 아픈데, 수사과정에서 ‘청구회’가 사회주의 폭력을 위한 비밀 폭력단체로 추궁 받았던 데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했고, “도운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신영복 선생의 ‘인식과 실천의 조화’ 탐구는 자기 안의 사고에 갇히기 쉬운 나도 다른 독자도 함께 가져가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감옥살이로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시기를 뺏겼지만 선생은 “징역이 아니면 얻기 어려운 시각과 그 적나라한 인간학으로 해서 기존의 도덕적 베일, 분식(粉飾)과 허위로부터 시원하게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으로 비약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가을이 오는 문턱에서 이 책을 읽었다. 감옥살이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었겠는가마는 '피서(避書)로 피서(避暑)' 했다는 신영복 선생의 여름 회고에 살짝 웃기도 하며, 선생이 『담론』을 썼던 사연도 짐작했다. 처칠 『2차 대전사』를 영 마뜩잖아 하며, 동양철학과 한국의 근대 사상 독서에 뜻을 내비치는 게 아버지께 보낸 1973년 편지에 있었다. 『담론』도 재독 하고 싶고, 읽지 못한 다른 책들도 읽고 싶다. 또 다른 게 보이리라.
“세상이란 관조(觀照)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