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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도서]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저/최세희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신이 있기를 바란 불가지론자 아버지,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신앙을 갖는 것뿐”이고 “불가지론자로 산다는 건 ‘실체가 있는’ 무신론과는 달리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자유주의” 입장이라고 비판하는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어머니, 신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질척하다고 일갈해버리는 철학과 교수 형 사이에서 자라난 반스의 회고담을 들으며, 그와 그의 작품들이 많이 이해되었다. 그의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의 부정적인 모습은 그가 자라온 환경 요인이 컸다고 보인다. 성에 대해서는 일체 거론하지 않는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가족들을 쥐락펴락하고 독선적이었으며 명료하고 실리적인 것만 따졌던 어머니가 지배하던 가정에서 반스는 “사춘기 땐 만사가 갑갑했고, 성년이 된 후엔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느껴졌다”라고 말했다. 그가 불가지론으로 뻗어가게 된 계기는 독선적인 무신론자인 어머니, 똑똑한 형에 대한 반발 심리였을지도 모르겠다.  

 

“형은 조지 6세가 천국에 가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나는 자위하는 데 심란해지는 게 싫어서, 조카는 기도를 해도 바라던 물건이 곧바로 배달되지 않아서 종교를 단념하다니. 하지만 나는 그런 발랄한 비논리성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형은 똑똑했고 얼음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지성과 실리에 따라 행동하며 똥을 잘 참고 차를 갖다주는 아이였다. 나는 팔방미인에 살갑게 다가들고 똥칠을 하는 아이였고 감정에 치우치는 성격이었다. 형은 대영제국을 차지한 것처럼 두뇌를 차지했다. 나는 세상의 그 많은 다양한 자질 가운데 ‘기타 세계’를 점했다. 이게 궁상맞은 환원주의란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평론가들과 해설자들이 이와 비슷한 해석을 예술에 적용할 때마다 (엘 그레코를 난시의 한 사례로, 슈만의 악보를 광기에 이르는 기호로 단순화할 때마다) 나는 극도로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이런 환원론이 필요하다 싶을 땐 기꺼이 나 자신에게 적용했다. 감정적인 내 인생을 지켜본 사람들이 내가 기타 세계를 수집한다는 의미가 노르웨이와 페로스 제도의 희귀한 소인만 취급할 정도로 특별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르는 때에.”

 

 

부모와 인간의 죽음, 신, 글쓰기를 말하는 그의 불가지론은 하나로 모인다.

 

“상기한 과학적 반론과 ‘설명들(예수는 ‘정말로’ 물 위를 걷고 있었던 게 아니라 얇은 얼음장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특정한 기상 조건의 경우라면……)’은 젊은 시절의 나라면 혹했을 법하다. 지금은 이만저만이 아니게 생뚱맞게 들린다. 스트라빈스키가 말했듯, 종교에서 조리 정연한 증거(와 그런 이유에서 반증이)란 음악에서 대위법 연습곡에 지나지 않는다.

신념은, 밝혀진 모든 원칙들에 의거해보면 다름 아닌 ‘일어났을 리 없는 일’을 믿는 것이다. 처녀 잉태설, 부활, 바위에 발자국을 찍고 승천한 무함마드, 사후의 삶.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선 도저히 일어났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일어났다. 또는 일어날 것이다. (아니면, 당연히 일어난 적 없고, 단언컨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들은 다분히 상투적인 질문들에 대해선 다분히 상투적으로 대답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소설은 아름답고 균형 잡힌 거짓말로 힘겹고 빈틈없는 진실을 봉합합니다.”

우리는 허구, 연극, 영화, 재현적인 회화를 즐기기에 앞서 명심해야 할 태도에서 불신은 보류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종잇장 위의 단어들, 무대나 스크린 위의 배우들, 캔버스 위의 색깔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고, 설령 존재한다 해도 단어들, 배우들, 색깔들의 단순한 복제, 일시적으로만 설득력을 갖는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은, 우리의 눈으로 탐사하는 동안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엠마는 살고 죽고, 햄릿은 라에르테스를 죽이고, 로토의 음울한 남편과 양단 드레스 차림의 그의 아내는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16세기 브레시아 이야기를 이탈리아어로 들려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고, 일어났을 리 만무하지만, 우리는 일어났으며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렇게 불신을 보류하는 태도와 믿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는 서로 많이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소설을 읽으면 종교에 대한 태도가 유연해질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전혀 딴판으로 종교는 소설가들이 최초로 거둔 위대한 발명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영혼들을 위해 이 세상을 설득력 있게 재현하고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종교. 아름답고 균형 잡힌 이야기에 담겨 있는 힘겨운, 빈틈없는 거짓말.”

 

 

자본주의가 독점을 좋아하는 것처럼, 종교도 권위주의에 빠진 시대에 그가 보기에 “도킨스가 인생을 살만하게 해준다면서 제시한 목록(음악, 시, 섹스, 사랑과 과학)”, “서머싯 몸이 옹호한 ‘유머를 갖춰 체념하는 법’을 연습”하면서 산다고 잘 사는 것도 잘 죽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육체의 고통에서나 마음의 고통에서도 쉽게 무너진다.

 

“역설적인 건 우리가 개인주의(자유롭게 사유하는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위업)를 거쳐 자신을 인식하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그로 인해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유전적으로 순종하는 구성단위로서 본다는 사실이다. 내가 사춘기 때 이해한 자아의 구조(막연히 영국식으로, 실존주의적으로 바랐던 자주성)만 가지고선 진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성장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홀로 서게 된 한 인간(키가 다 자란 ‘호모에렉투스’, 궁극의 혜안을 갖춘 ‘호모사피엔스’)으로서 자신을 위해 채찍을 휘두를 수 있을 때 존재가 완결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미지는 다른 걸로 바꿔야 한다. (사실 이 이미지는 내가 얼마간 멜로드라마화한 것이며, 그런 깨달음과 자기투사란 늘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내가 휘두를 채찍을 갖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그 채찍의 끝에 있고, 날 후려치고 있는 것은 어깨를 으쓱하거나 맞서 싸워 치워버릴 수 없는 유전상의 소재를 땋아서 만든 길고 피할 길 없는 밧줄이라는 의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도덕과 사회의 진보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진화가 단순히 인종을 현재의 감탄스러운 경지까지 이끌어온 과정이라는 것 말고도, 우리의 도태를 논리적으로 암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잊는다.”          

      

 

“플로베르는 물었다.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태도인가, 아니면 바보짓인가?”

그는 우리에게 ‘절망의 종교’를 가져야 하며 ‘우리의 운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운명처럼 무감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았다.

“자아는 살아남는가? 그렇다고 말하는 건 내게는 주제넘은 수작과 오만, 영원한 질서에 반기를 드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바야흐로 죽음은 인생만큼도 우리에게 비밀을 드러내지 않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종교를 불신한 반면 영적인 충동에 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고, 전투적 무신론에 대해선 의혹을 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겐 모든 교리가 그 자체로 혐오스럽다. 그러나 나는 교리들을 인류의 가장 자연스럽고 시적인 표현으로 가공해낸 기분은 헤아린다. 나는 교리가 우매와 허위라고 일축해온 철학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교리에서 발견한 건 절박함과 본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예수성심 앞에서 가톨릭식으로 무릎 꿇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물신에 입 맞추는 흑인들을 존중한다.””

 

 

소설가란 인간으로 사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반스에게 소설 쓰기는 삶을 통찰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꿈을 꿈답게 보는 태도.

“인간으로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소설가로서 나는 그 반대 견해를 찾는 것을 업으로 삼고, 죽음의 편에서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일환이 다른 하나(영생)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론, 전에도 이루어진 시도다. 그런 점이 죽음이 안고 있는 골칫거리 중 하나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걸 하나라도 찾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는 가족들, 그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진실과 어긋나는 지점을 계속 만났다. 왜?

                   

“소설가(다시 나)는 진실의 정확한 본성에는 별 관심이 없고, 진실을 믿는 사람들의 본성, 그들의 신념을 공고히 하고, 서로 경쟁하는 내러티브들 사이의 지층에 더 관심이 있다. 허구는 전적인 자유와 철저한 통제를 결합하는 과정, 정확한 관찰과 상상의 자유로운 유희의 균형을 잡는 과정, 거짓말을 이용해 진실을 말하게 하고 진실을 이용해 거짓말을 하게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허구는 구심성이면서 또한 원심성이다. 허구는 그들의 모든 모순들, 당착들, 그리고 해결 불능의 가운데에서 모든 이야기를 원한다.”

 

진실은 우리가 만든 착각이거나 바라는 진실일 때가 더 많은 건 아닐까. 스트라빈스키가 노년에 “나는 기억이 진실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기억이 진실할 수 없음에도, 사람은 추억에 기대어 살지 진실에 기대어 살진 않는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했듯이. 부재와 수수께끼로 가득한 삶 속에서 진실에의 접근 불가능을 통렬히 느끼면서 우리는 나아간다.

 

 

ps)

 

죽음에 관한 에세이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실즈『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보다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이 훨씬 풍부하고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줄리언 반스에게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신랄하기론 둘다 막상막하겠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무신론 책보다 대중에겐 불가지론자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이 더 호응이 높을 수도 있겠다.

그는 이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했지만 예순 둘 나이에 죽음에 대한 책을 쓴다면 그 의미가 없을 수 없다. 그가 처음 본 (닭의) 죽음, 가족과 주변인의 죽음, 많은 철학자와 문인의 죽음,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살펴보고 있으니 말이다.

반스는 서머싯 몸의 박학다식에 매우 존경을 표했는데, 이 책을 읽는 우리로서는 반스에게 그와 같다 하겠다. 삶과 죽음, 문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위트 넘치는 강의 같으니까.

아, 이 책 읽고 나면 서머싯 몸 『서밍 업』을 또 안 볼 수가 없다. 미뤄뒀던 그 책도 이제 읽을 때가 도래했다.

몽테뉴가 키케로를 인용하고, 키케로가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고, 줄리언 반스가 그들을 인용하고, 그렇게 한없이 우리는 삶과 이야기와 죽음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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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시골아낙

    우리는 삶과 이야기와 죽음의 공동체 이 말 너무 좋네요.. 이 책이 더 끌리는 걸요!!! 이 책을 사야겠어요 하하하 호호호

    2019.10.26 10:3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CircleC

      읽었던 반스 책 중에서 저는 이 책이 현재 제일 좋아요ㅎ 죽음 주제는 공감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죠.
      아이고, 시골아낙 님 책 장바구니가 또....

      2019.10.28 19:21
    • 파워블로그 시골아낙

      밤마다 낄낄거리고 있네요!! 참 가차없는 솔직함이랄까, 종교 가족에 대한,, 신은 없지만 신을 그리워한다.. 질척대는 반스라니

      2019.11.20 09:05
    • 파워블로그 CircleC

      ㅎㅎ 즐겁게 읽으신다니 추천한 보람 있네요^^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스의 거침없음 매력적이죠!

      2019.11.2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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