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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해의 책 2019
페스트

[도서]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저/김화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1957년 프랑스 작가로는 아홉 번째이고 최연소(44세)로 스톡홀름에 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는 노벨상을 받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나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정확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나는 부정(否定)을 표현했다. 세 가지 형태로 말이다. 소설로는 『이방인』이었고 극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였으며 이념적 형태로는 『시지프 신화』였다. 만약 내가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겐 전혀 상상력이 없어서 지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부정 속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시지프 신화』의 서문에서 그 점을 미리 밝혀 놓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세 가지 형태의 긍정을 표현해 보고자 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과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이념적인 것으로는 『반항적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의 한 층위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구체화해 가는 중인 계획들이다.”(플레이이드판 카뮈 전집 2권, 1901쪽)

 

그리고 스톡홀름 대학교 강연에서 한 알제리 청년의 공격적인 질문에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보다 먼저 나의 어머니를 옹호하겠다.”라고 대답해 좌파 쪽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인상을 줬다. 스승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탈퇴했듯이 철학을 공부했던 카뮈는 추상적 이념보다는 현실을 더 마주 보려는 지식인이었다. 첫 구상부터 마지막 결정고까지 칠 년이 소요된 『페스트』(1947년)에서도 그러한 의지가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이 전쟁 시기를 통과한 것을 생각하면 이 소설 내내 페스트와 전쟁이 동의어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 소설의 제사도 이미 그걸 말하고 있었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ㅡ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페스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갑작스레 어머니, 자식, 남편, 아내, 연인과 생이별을 하고 도시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희망을 잃어가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게 전쟁과 무엇 다르겠는가.

역자는 카뮈가 이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 “톨스토이, 대니얼 디포, 세르반테스(『작가수첩』, 2권, 12쪽)”, “현실 경험의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주요한 모범으로 삼게 될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정독하고 노트”(『작가수첩』, 1권, 250쪽)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친연의 느낌을 가진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였다. 사형대 앞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도스토옙스키가 작품마다 사형 비판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를 끼워 넣음과 동시에 무신론자와 종교론자의 숙명론을 펼쳤듯이 카뮈도 『이방인』에 이어 이 소설에서도 사형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증오를 보여줬다. 의사 리유에게 타루가 사형수를 처음 보았던 경험, 아버지가 사형 선고를 내리던 충격을 말하는 장면은 정말 도스토옙스키적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 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 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렇게 믿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으며, 또 대체로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중략)… 물론 우리들도 역시 때에 따라서는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몇몇 사람의 죽음은 더 이상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계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진실이었으나, 어쨌든 나로서는 그런 종류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주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올빼미 씨 생각을 했고, 언제나 계속할 것 같았어요. 내가 사형집행을 구경한 그날(그것이 헝가리에서의 일이었어요)이 될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날, 어린애였던 나를 휘어잡았던 바로 그 현기증이 어른이 된 나의 눈을 캄캄하게 만들었어요. …(중략)… 그 이후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부끄러워했어요. 아무리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 측에 끼어들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내가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모든 논리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몸 한 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고, 우리들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오늘날도 그 평화를 되찾아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그 누구에게도 치명적인 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이제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비록 인간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되도록 해를 덜 끼치며,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하도록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이 유행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유.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해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뜻하지 않게 이 사건의 연대기를 관찰하고 기록하게 된 리유와 타루는 추상적 고민 속에 있었다. 두 사람 다 무신론자였지만 타루는 외부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서도 신 없는 聖人이 될 수 있을지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에 휩싸여 살아왔다면, 가난 속에서 강인하게 자라왔던 리유는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공적 연대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였을까. 페스트가 물러가던 때에 타루의 방심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친구도 아내도 잃은 리유도 온전히 살아남았다고 할 수 없다. 그의 마음속의 전쟁, 페스트는 죽는 날까지 남을 테니까.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다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데, 오통 판사의 아들이 죽어갈 때 누구도 아이를 구할 수 없었다. 리유는 신의 뜻과 은총 운운하는 파늘루 신부에게 쏘아붙였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카뮈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반항’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다. 등장인물의 결과에도 카뮈의 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건강’을 위해 일하려 했으며 모두의 삶과 죽음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객관적 기록자로서 이 일을 남기려한 의사 리유, 외지인 기자로 왔다가 페스트 때문에 도시에 갇혀 도주하려 했으나 사랑을 포기하고 옳은 일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오랑 시에 남기로 한 랑베르, 소시민이었지만 자기만의 예술 창작에 몰두했던 순수함 때문이었는지 페스트에서 회복한 늙은 서기 그랑, 자살하려 했다가 모두가 불행해지니 행복해했고 다시 도시가 회복되려 하자 무차별 난사로 또다시 파멸로 향한 코타르, 억지적 믿음만큼 괴상하게 죽은 파늘루 신부 등. 인물들의 선악이 뚜렷해 보이스카웃 소설이라는 혹평도 있었지만 ‘내면의 갈등과 모순과 이상을 깨어진 거울 조각들처럼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게 한 작가의 서술에 빠져 있는 동안은 느낄 새도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의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은 절망 속에서 모두가 한 몸이 되는 ‘오랑 시민-우리들’이다.

잠복해 있는 동안은 알아차릴 수 없는 질병처럼 전쟁도 일단 시작되면 우리를 쉽사리 악의 공범자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영웅주의로 해결할 수 있을까. 카뮈는 아니라고 말한다. “영웅주의에는 부차적이라는 본래의 지위, 즉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 바로 다음에 놓이되 결코 그 앞에 놓일 수는 없는 그의 지위”라고 서술했다. 행복에의 욕구, 연대, 사랑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투쟁에서 살아남게 만든다.

 

 

타루는 이야기를 맺으면서, 다리 한쪽을 흔들다가 테라스 바닥을 가볍게 탁탁 치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묵묵히 있던 의사는 몸을 약간 일으키면서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건 공감이죠.”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이 두 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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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시골아낙

    행복에의 욕구 연대 사랑만이 우리를 살린다!! 내내 행복한 날들이다가 요즘 뭔가가 걱정이 되나 가슴이 답답해요 일상의 행복이 제일 인 것 같습니다

    2019.12.05 07:0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CircleC

      요즘 전 작은 일만 틀어져도 신경이 너무 곤두서요ㅜㅜ... 호르몬 문제인가 날씨 문제인가 연말이라 더 그런가 싶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줄이려고 하는데 일단 일하기 싫어병이 지병으로 있으니... 흑흑))))
      시골아낙님도 컨디션 잘 조절 하시길/

      2019.12.0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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