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K. 딕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늘 드는 생각, 한결같은 생각은, 이걸로 장편을 썼어도 충분했을 텐데.. 라는 것이다. 그의 단편들은 그 짧은 작품 내에 기이하고도 세상을 뒤짚을 만한 거대한 상상력을 담고 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압축적이고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단편 작품만을 가지고도 장편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디서 들은 건데, 아마도 해석문에서 읽은 듯, 필립 K 딕을 작가들의 작가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그의 천재적인 미친듯한 상상력에서 오는 수많은 이야기가 '기술적이고 세련된' 현대 작가들의 상상력 부족이라는 한계를 샘물처럼 끊임없이 보충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현상을 기여하는 또 한 가지 요소는 필립 K. 딕의 단편 자체의 투박함에 있지 않나 싶다. 내 생각에 PKD의 단편들은 작가들의 소재 사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지 않나 싶다. 르귄 여사의 하늘의 물레는 대표적으로 회자된다. 그의 글은 세련되지 못했고, 문장이 아름답거나 특별하지도 않다. PKD의 단편을 읽을 때는 현대의 문학이 규정하는 문학적 요소에 신경쓰지 않고 그저 이야기 자체만 집중하면 된다. PKD의 단편에는 또한 캐릭터라는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화의 목적은 거의 이야기와 특수하고 기이한 상황 전달에 있다.
진흙발의 오디세우스는 내가 몽땅 산줄 알고 있던 PKD의 전집(선집)에 빠져있다는 걸 알고 부랴부랴 구입한 두 번째 단편집이다. 세트에 있던 건 장편이었던 거다. 지금 대략 세어보니 약 1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내니>와 <머리띠 제작자> 두 개의 작품을 읽었다. <머리띠 제작자>는 영국의 공중파 TV 채널4에서 방영했고, 이제 아마존프라임에서 스트림하고 있는 연작 단편 드라마 <일렉트릭 드림>의 에피소드 중 한 개로 제작된 작품이라, 드라마와 함께 같이 보느라 먼저 읽었고, 내니는 제목에 끌려서 두번째로 읽었다. 머리띠 제작자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초음파니 fMRI니 하는 것들을 머리에 뒤집어 쓰거나 거대한 의료기기 속에 들어가서 머리 속을 분석해서 두뇌의 활동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현대의 시대에서 볼 때에도 역발상적인 기묘한 작품이다. 배경은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종족(?)들이 경찰이나 정부나 단체 등에 고용되어 누구의 생각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된 자칭 '개방된' 세계에 이 머리띠(원작에는 후드라고 되어 있다)를 쓴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인민의 적이 되어 살해되거나 투옥된다. 당연하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자유이고 그걸 지키고자 하는 것 역시 그 누구도, 신마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데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PKD는 교묘하게도 이것을 뒤집는다.
사람들이 머리띠를 두른 사람을 발견하고는 떼로 몰려가 폭행을 하고 인민재판을 하는 이유는 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드러내놓지 않고, 머리띠 속에 감추느냐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 생각을 읽는 자들인데, 이 사람들 역시 크게 자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변종처럼 진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종족들인데, 정부와 경찰 등 모든 곳에서 이들을 이용하면서도 이들을 향한 눈길 또한 곱지만은 않다. 이유는 그들이 인간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남을 바라볼 때, 그의 특수성을 이용하면서도, 나를 비롯한 대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는 그 다수를 불편하게 하거나, 우월감 혹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자기기만적인 월등감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들이 가진 힘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 누가 알까. 일렉트릭 드림의 에피소드에서 본 이미지와 원작에서 읽은 내용이 꽤 다른데, 지금 이걸 쓰는 마당에 두 개가 좀 섞여서 짬뽕되는 것 같은데, 다시 읽고 와서 다시 정리해야겠다.
내니는 굉장히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내니를 딱히 골라 읽은 이유는 최근 읽은 테드창의 소설집에서도 전자 유모와 관련된 소재의 단편(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을 만났었는데, 이보다 50~70년이나 앞선 PKD가 같은 소재로 어떤 상상을 했을까가 궁금해서였다. 테드창의 소설집에서 나온 보모보다 PKD의 내니가 기술적으로는 더 발전된 상태다. 두 작품 모두 보모에 대한 자세한 스펙을 공개(?)하지는 않은 상태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테드 창의 자동 보모는 제목에서처럼 기계식이어서, 안고 흔들어주거나 아기에게 할 수 있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아기를 키우는 자동 보모이다. 반대로 PKD의 내니는 완전 휴머노이드된 로봇이다.
"새삼 드는 생각인데, 우리는 어떻게 내니도 없이 자랐던 걸까.” 메리 필즈 가족이 내니를 구입한 이후 이 고마운 내니의 탁월한 아이 케어 능력에 아이들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내니와 너무나도 즐겁고 안전한 하루를 보내며, 이 때문에 가족의 생활 전체가 편안하게 바뀐 것을 새삼 새록새록 느끼던 어느 날 밤 필즈 부인은 내니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여러 내니들이 등장하는데, 개든 장난감이든 그 뭐에든 이름을 붙이며 친근하게 불러대는 미국 사회에서 좀 예외적으로 보이는게, 이 내니들에는 이름이 없다. 다만 색깔이 있을 뿐이다. 이 색깔은 제작사의 로고에서 표현한 색인 듯하다. 필즈가족의 자녀 진과 바비의 내니는 초록색 내니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 내니와의 달리기 시합에서 이긴 둘은 신나하지만, 여기서 내니의 두번째 징후가 포착된다. 기계는 낡는다. 당연히 3년된 기계라면 성능이 떨어져서 아이들의 달리기보다 늦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안전을 위해 아이보다 느린 내니라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계의 노후라는 주제를 건드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간다.
늘 그렇듯 밤에 집을 나간 내니는 다른 내니와 만나 싸움을 한 듯하다. 본문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여기저기 조금씩 긁히고 망가지는 이유는 바로 그런 싸움 때문인 듯한데, 이제까지는 파괴적인 상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어느 날 밤 크고 사나운 턱을 가진 블루 내니를 만난 그린 내니는 뒹굴고 싸우다가 매우 망가진 상태에서 되돌아온다. 아이들과 너무 정이 들어서 새로 사는 대신 고치러 간 필즈는 서비스 센터에서도 엉망진창이 된 같은 기종의 내니들을 발견하고, 고치는 대신 새로운 모델을 구입하라고 권고하는 센터 직원에게도 화를 내며 고치고 돌아오지만, 아이들과 외출한 그린 내니는 공원에서 훨씬 크고 고성능의 오렌지 내니와 만나 한바탕 붙어 완전히 폐기되는 상태에까지 다다른다. 내니 비지니스의 모든 것을 꿰뚫게 된 필즈는 결국 새로운 모델을 사러 가고, 가장 고성능 무기를 장착하고 몸집이 가장 크고 위협적인, 막강한 성능을 가진 블랙 모델을 사온다. 아이들은 신나한다. 아이들의 엄마는 이제 (새 내니가 다시 다른 내니와 싸워 다치지 않도록 아끼기 위해) 공원에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충고하나, 현존하는 내니들 중 가장 고성능의 무기 시스템을 가진 내니를 구입한 아이들의 아빠 필즈는 아니야 얘들아 이 내니를 데리고 공원에 가렴 하면서 이 내니가 그 어떤 내니와 싸워도 이길 것임을, 그가 상대하는 모든 내니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인공지능은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 명제를 자주 상기한다. 이런 깔끔한 전개의 단편을 읽으면 인공지능 시대에 '의식'이라는 어려운 정의와 마주쳐야 하는 복잡한 상황을 굳이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 라는 회의가 들기까지 한다. 이를 내멋대로 해석해보면 인공지능이 어떤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인공지능의 설계 의도에 어떤 변수들이 각자 얼만큼의 가중치를 가지는가로 볼 수 있다. 내니가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은, 애초 휴머노이드의 설계 초기 단계에서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내니가 상업적 제품이라는 사실은 다시 새로운 제품을 팔기 위한 전략적 목적에서 제품의 행동 변수에 무엇을 추가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얼마 전 휴대폰 오래쓰기 대회라도 나갈듯 휴대폰을 바꾸지 않은 남편이 결국 바꾸게 된 이유가 있는데, 내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였다. 나를 포함 세 명이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이 얘기를 했더니, 어머 우리 남편도 그것 땜에 바꿨어, 어머 우리도 이렇게 세 사람이 일치를 보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같은 회사 제품의 플래그쉽 모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상상력을 펴보았다. 잉크프린터가 재생 잉크카트리지의 사용을 막기 위해 잉크카트리지의 생산년도를 읽어서 오래된 것은 처리하지 않는대잖아. 이 휴대폰들은 세상의 모든 휴대폰 오래쓰는 아재들을 막기 위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GPS를 교란시키는 소프트웨어를 심어놓은 거 같아. 이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마트폰에서 내비는 핵심 기능 중 하나이고, 이게 고장나면 길바닥에서 같은 길을 빙글빙글 돌게 될 수도 있으므로, 이런 전략이 새 스마트폰 판매 전략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스마트폰을 오래쓴 아재들은 그 내구성에 다시 그 회사의 모델을 구입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건 나의 생각. 그리고 내니들은 서로 싸워 강력한 내니를 생산하는 회사가 시장에서 살아남고, 아이를 돌본다는 애초 목적이 사라진다는 PKD적 기묘하고도 투박한 상상력과 묘하게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