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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

[도서] 하품

정영문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한국 작가들의 중편을 부담없는 가격가 가벼운 제본으로 담고 있는 소설향 시리즈가 있다. 몇년 전 이 출판사는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편 소설의 가치를 되살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선보이고자 (출처 소개글)'  5권을 특별판으로 개정 출판했는데, 그 중 하나다. 얼마 전 읽은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과 표지가 비슷해서 찾아보았더니, 이 시리즈의 소설이었다. 여러 개의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최초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는 평가만으로도 일단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 


특별판 말고도 이 소설향 시리즈가 좋은 게 일단 중편 분량이라 단편보다는 깊이있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다가, 분량이 짧으니 그닥 궁합이 안맞는 작가라 하더라도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유튜브 영상과 SNS 등을 주요 매체로 접하게 되어 손글씨 쓰기는 물론 글자만 길게 읽는 일이 점점 힘들게 되어 가는 세대에 중편 소설은 좋은 선택이다. 짧고 가벼운 면에서야 단편이 더 나을테지만, 이상하게도 단편이 제공하는 텍스트에서 집중할만한 서사를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어서.. 아무튼 이 시리즈 중의 하나인 죽은 올빼미 농장으로 만난 백민석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도 찾아 읽게 되었다는게 중요한 사실이다.


정영문의 하품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유중 하나가 한국 소설 중에서도 형식적으로 파격적이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읽었지만 작품이 어떤 이야기, 어떤 서사를 담고 있는지를 옮기기는 어려울 거 같다. 왜냐하면 그런 게 없으니까. 이 작품은 예전에 조직 폭력배나 사기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두 남자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주고받는 만담같은 대화로 시작해서 그 대화로 끝난다. 배경이나 심리 묘사가 없고, 다른 등장 인물들도 전무하여 오직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소설은 마치 소극장의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하고,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들을 연상시킨다. 


오로지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대화가 과거의 어떤 서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바쁘다. 어찌 보면 그냥 아주 친한, 너무 친해서 아무 격의도 없고 그저 서로를 깎아내림으로서 자족하는 두 사람의 농담 같은 대화를 보는 듯하지만, 화가가 있고 화자의 생각속에서 그들이 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 대화도 자네 그런가 하는 노인들의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무슨 번역서를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대화에 어떤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직역위주의 번역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서로 맥락 없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품은 지루하고 권태로울 때 나온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의 대화는 일상의 권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 때,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혹은 낙으로 여기며 살았던 자신들의 과거를 희화화하는 순간마저도 두 사람이 만난 이 시간의 비루함을 이기는 방법은 서로를 향한 모욕과 무시 밖에 없다는 듯 두 사람의 대화는 자신의 미러와 같이 똑같이 닮은 상대방을 향해있다.


내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다시 말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옳을, 이 삶,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어. 그 시작에서부터 무산된 이 삶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르지. 내게 있어 삶이 의미있었던 것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에였을 뿐이야. 그가 말했다.


나는 누가 삶의 의미를 따지면 하품이 나온다. 얼른 그 주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쓴다. 내가 저 문장을 만났을 때, 그러니까 '내게 있어 삶이 의미있었던 것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에였을 뿐'이라는 멋진 문장을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모역만이 주가 되는 의미없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서사 없는 소설이라 할 지라도, 의미없음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를 헐뜻고 무시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증오나 혐오가 묻어있지는 않다. 둘이 함께 같이 살 생각까지 했다는 대화가 나오는 걸로 봐서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상대방의 존재가 맞지 않는 옷 같이 착한 아내와 함께 사는 것보다 자신들의 삶에 더 적합하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 비루함에 있어서 서로를 구분하지 못할만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 어떤 때는 우리가 서로 구별이 안 갈 정도로,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어, 우리의 비루함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주었던 비루함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던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대화는 때로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는 만담 수준에 다다른다. 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하는 말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만담 속에 그들이 이제 둘을 하나로 묶었던 비루함 마저도 박제된 과거가 되어 정체되고 고여 있다. 그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게 두'렵ㄱ, '변화하지도, 진화하지도 않는, 전개도 반전도 없는, 다만 끈질기게 유지되는 생이 있을 뿐'이다.  그 '운명의 매듭을 저주 속에서 풀어가고 있는'데, 때로 이러한 중얼거림이 서로 대화가 아니라 둘이 서서 각자 중얼거리는 인상도 받는다. 


-- 내 모습을 두고. 자네의 얘기가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자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모양이지, 내가 말했다.

-- 미안하지만 그렇다네, 그가 말했다.

-- 괜찮네,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드네. 내게는 내가 원할 때 나를 놀려주는 사람마저도 없거든, 내가 말했다.

-- 내가 자네를 노렸다고, 자네의 목숨을, 그가 말했다.

그는 귀가 나보다도 더 먹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계속해서 서로를 향한 모욕을 계속한다. 


? 나의 가장 좋지 않은 점은 뭔가, 그가 말했다.

? 가장 좋지 않은 건 자네의 좋지 않은 점 중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자체라는 생각을 했네, 내가 말했다


사실 친한 친구들끼리 이런 농담은 크게 모욕거리가 되지 않겠지만, 그게 진담일 때는 사정이 다르다.  그둘이 상호 인터랙티브한 대화를 하고 있을 때는 서로를 모욕하고 무시할 때다. 나는 자네와 함께 있는게 수치스럽다고 말하니, 수치를 느끼고, 그 수치를 더욱 더 잘 느끼기위해 얼굴을 감싸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수치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더욱 더 잘 느끼기를 바랐다'. 


그들이 우연히 만난 곳은 동물원이었는데, 그들의 대화는 화자의 상대방이 코끼리 우리를 향하면서 끝난다.  그 일그러진 풍경을 자신의 여름의 모습으로 깨달으며, '하루로부터 다른 하루에까지에서 또 다른 하루로 옮겨 가는 것이 허공을 내디디는 것처럼 아찔하게 느끼며' 글은 맺는다. 


밤과의 거리는 너무도 멀고, 내가 그것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그것과의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 같군,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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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나난

    예전에 하품은 맛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이야기는 또 다르군요. 완전 단편은 아니어서 읽는 맛이 조금은 살아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9.10.25 12:43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게스

      그래도 스토리가 없어서 엥 이게 뭐야 할 수도 있어요 ^^.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더 재밌을 거 같아요.

      2019.10.2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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