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점을 명심하라. 한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모든 일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사람은 죽는다. 옛 질서는 무너진다.
새 사회가 탄생한다. “세상이 끝났다”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행성은 변함없이 존재하기에.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완전히.
왕좌의 게임을 보면, 특히 대격돌이 벌어지기 전 시즌 전반에 걸쳐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 is coming)'는 말을 경고와 각성으로 자주 듣는다. 겨울을 춥고 혹독하다. 안그래도, 이미 배경에서 얼음 방벽은 눈덮힌 겨울이 자주 나타나기에 매번 존 스노우와 스타크 가문의 사람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앞으로 올 겨울은 대체 어떤 종류의 겨울일지 얼마나 혹독하고 긴 겨울일지 몸서리쳐진다. 한 때 지구가 빙하기에 들어 많은 종들이 멸종하는 종류의 긴 겨울이라면, 곰과 개구리들이 겨울잠을 식물들이 땅 속에 숨어활동하지 않는 종류의 매년 겪는 소프트한 겨울이 아니라, 살아남기 어려운 종말을 예견하게 된다. 이런 긴 겨울은 훨씬 이전 르 귄의 소설에서도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우주의 어떤 행성에서 별을 도는 주기가 매우 길어 생기는 긴 겨울인데, 십여년 혹은 수십년씩 지속되는 이 겨울을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는 철저하게 가족 계획을 통제한다.
휴고상 홈페이지에 가면, 정말로 상의 종류가 많다. 과학 및 판타지 분야의 컨텐츠를, 단편, 중단편, 중편, 장편, 시리즈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코믹북, 비디오, 기타 여러가지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그 중 단연코 가장 맨 앞을 장식하는 분야는 당연하게도 장편소설이다. 그런데 휴고어워드 홈페이지를 가보면 2015년 류츠신의 삼체를 끝으로, 3년간 한 작가가 계속해서 장편 부문에 우승을 차지했고, 그 작품은 <부서진 대지>라는 하나의 시리즈 안에 속해 있다. 다시 말해 시리즈의 1권인 이 책 다섯번째 계절이 나왔던 2016년에 첫 수상, 그 다음해는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The Obelisk Gate>로, 그리고 작년에는 시리즈의 마지막인 <stone sky>가 받았다.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계속해서 늘려 속편을 내는데, 그게 계속 최고상을 받았다. 시리즈가 끝나고 난 올해에야 다른 작가, 다른 작품에게 영광이 돌아갔는데, 제목은 The Calculating Stars 이고 이 책도 시리즈다. 대체 어떤 작품일까. 3편 연속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쓰는데 매번 눈높은 휴고상 심사자들의 기대를 저버지리 않는 작품, 3회 연속 가장 영예의 장편소설에 이름을 올린 작품. 출판사에서 그토록 마케팅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목빠지게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도 안나와서, 나오기 전에 영문판을 구해 조금씩 읽다 흐지부지했는데, 번역본이 나오는 바람에 마저 읽을 수 있었다. 기대를 저버리는 책은 아니었지만, 한국판조차도 읽기가 아주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지진과 화산 활동 등으로 지구가 마구 요동치는 세계관 자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하여서 그런 감정이입들을 꿀꺽 꿀꺽 삼키면서 읽어나가는 일 자체가 잘 안돼 진중한 독서를 요구한다.
SF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들이 흔하게 등장한다. 그들의 능력은 마블의 캐릭터들과 어느 정도 맞닿아있다. 약간의 마법적 요소와 거기에 붙인 과학적 수식. 이 존재들이 하는 역할이 단지 마법적 환상만을 보여주고 악과 대항하여 멋지게 싸워 이긴다면 헐리우드 대형 블록버스터들이 애정하는 공식의 스토리들이 되겠지만, 이 존재들의 의미를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빗대어 생각하게 한다면 의미있는 과학 소설로서 빛날 것이다. 여기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 지구의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마법적 존재지만, 그 능력 때문에, 인간에게 배척받는다.
오로진들은 인간일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이다. 단지 대지의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타고났을 뿐이다. 사람들은 마녀사냥을 하듯 오로진을 발견하면 죽인다. 폭력의 두께는 두려움의 강도에서 나온다. 지구가 흔들리고 마그마를 내뿜고, 활발한 지각활동을 하면, 그것을 잘 다스려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오로진들이지만, 신체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을 때 그러한 종말에 가까운 지각 활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도 바로 오로진들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한 아이가 죽었다. 2인칭으로 지칭하는 너(에쑨)은 사랑하는 아기를 잃었다. 자신이 오로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10년째 결혼중인 너는 두 아이가 있었고,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남편이 아기를 죽였다. 바닥에는 아기의 시체가 있고, 남은 딸아이와 남편의 행방은 모른다.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남편을 찾아 죽이기 위해, 너는 마을을 떠나 헤매기 시작한다.
그리고, 너 에쑨 외에 여러 시점의 다른 오로진들의 삶이 교차 묘사된다. 어린 소녀 다마야는 학교에서 놀다가 우연히 자신의 능력이 발각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의 부모는 그녀를 마구간에 숨겨두고 '가디언'이 될 샤파에게 잡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펄크람이라는 곳으로, 오로진들을 모아 두고 교육시키는 공동체다. 그들의 능력을 조절하여, 인류에게 쓸모있는 일을 하도록 교육하는 곳이다. 이제 다마야는 그곳의 다른 소년 소녀들과 함께 학교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조정하여 지구에 일어나는 각종 자연재해들, 쓰나미, 지진, 화산폭발 등을 조정하는 법을 배운다.
이미 펄크람 조직의 일원으로서, 손가락에 계급을 표시하는 4개의 반지를 낀 시에나이트는 알리아라는 항구 도시의 골치 거리는 산호초를 조산력의 힘으로 청소하라는 임무를 맡는데, 아직 계급이 낮아, 10반지를 낀 상급자와의 동행을 배정받는다. 10반지는 오로진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고난도 기술을 가진 최고 상급자를 지칭한다. 그런데, 펄크람의 오로진들은 지구를 구하는 임무 외에도 또다른 임무가 있는데 바로, 펄크람의 인구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어진 상급자와 임신을 하여 지역 사회에 아이를 낳아 주어야 한다.
임신이라는 게 여성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 당연히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이 10반지 상급자는 바로 그녀의 임무를 돕기 위해 동행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펄크람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씨를 제공해야 할 대상이다. 초호화판 꼭대기 층에서 큰 공간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열반지 상급자는 그녀가 나타나자 무례하게 굴고 투덜거리며 푸대접을 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섹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며 내키지도 않는 섹스를 해야 하는 그녀에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운다. 그러나 그의 솔직한 무례함이 그녀를 더욱 전투적으로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주어진 자식 만들기 의무를 마치고 이 상급자에게 잘보여 더 많은 공훈을 쌓아야 더 멋진 조산술(지구를 다스리는 능력)을 행하며 멋진 삶을 살 수 있음을 안다.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만족해야 마땅할 상급자 알라배스터는 퉁명스럽고 불만이 가득한 채로, 마지못해 시에나이트의 섹스에 겨우 응하고, 둘은 산호초 청소를 위해 먼 길을 말을 타고 알리아로 떠난다.
애초 죽은 아들의 시체와 마주하고 길을 떠난 너, 그 아들을 죽인 남편과 그 남편이 다시 죽일 딸의 행방을 찾아 떠난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예닐곱살의 어린 아이와 동행을 하게 된 너는 그 아이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고 남편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서로 돌봐주며 동행하고, 우여곡절 끝에, 거지꼴의 한 무향민과도 동행하게 된다. 알리베스터와 티격태격 길을 떠난 시에나이트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여행 도중 상상도 할 수 없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이 잉태하여 태어나게 될 아이들, 이미 알라베스터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들이 겪어 왔고 겪게 될 비극의 전말 같은 것이다. 이 모든 일들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음모가 있음을 서서히 깨닫는 그들...
한편 어린 다마야는 이미 샤파가 자신을 수호자로 칭하며 그녀를 펄크람에 데려올 때부터 서서히 자신과 같은 종족이 저주받은 족속이며, 펄크람에서만이 그들을 통제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곳임을 자각한다. 압박감 속에서 많은 것을 공부하고 익히는 그들은 마법과도 같은 조산술을 배우고 익히지만 학교 분위기는 해리포터가 우정을 쌓고 모험을 하는 그 멋진 마법학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소한 일로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해도 구해줄 만한 정의에 찬 교관은 없다. 사소한 일로 또래 아이들에게 왕따와 괴롭힘을 당해 쫓겨날 만한 위기에 처하지만, 혼자만의 계략으로 위기를 이겨내고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도 복수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혼자가 되어, 유일한 취미로 펄크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탐험한다. 그러다가, 유메네스의 지도층의 아이인 비노프가 남몰래 펄크람에 숨어들어 온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찾는 곳을 돕다가 들키게 된다.
이렇게 세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쓰인 이야기는 위기의 절정에 다달을 때 쯤 서서히 하나로 뭉쳐지며 각 시점의 인물들 및 주변인물들의 정체 관계 과거 등등이 드러나게 되는데.. 거의 모든 반전들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다시 쿵 하는 새로운 반전이 독자를 맞고 있다. 혹자는 지구를 괴롭힌 인간들에게 울리는 경종의 메시지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지구 대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하고 그 지구와 어떤 에너지의 교감을 통해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종족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그 어떤 메시지적인 의도로도 깎아내릴 수 없는 판타지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 이 소설이 완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며, 남편과 딸을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결국 발견한 것은 엉뚱한 과거였으니, 앞으로 무한하게 많은 이야기의 꼭지들이 펼쳐져 있다. 이 책이 1월에 나왔는데, 2편과 3편도 슬슬 번역되어 나올 때 쯤 된 거 아닌가 싶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편을 찾아 헤매는 너. 하지만 같은 이유로 너를 찾아 다녔던 사람이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될 때, 끝나지 않는 돌고 돌아 되풀이되는 세상의 이치를 느낄 수 있다. 겨울은 언제 올건가, 오기나 할 건가 하고 오매 불망 겨울을 기다리며 10년을 보아왔던 왕좌의 게임 팬들처럼, 이 소설에서 말하는 다섯번째 계절, 그 종말은 언제 어떤 식으로 불어닥칠 것인지도 읽는 내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야,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인지, 앞으로 올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 같은,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 너의 이야기에 더욱 배가 고파진다.
알라베스터와 씨에나이트와의 관계 역시 굉장히 기이하다. 함께 자식을 낳고, 함께 키우는 관계이니 비록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부사이지만, 둘은 동시에 다른 남성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성은 충실히 동시에 둘을 만족시킨다. 이런 쓰리섬적인 관계가 영화나 일반 소설을 통해 묘사될 때 매우 부적절해 보이게 마련이지만, 정말이지 저자는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세 명 모두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지구는 지금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항상 분노하여 일순간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통채로 없앤다. 그렇다면 아버지 대지, 지구는 왜 그토록 분노했을까? 여기 약간의 힌트가 있는 대목이 있다. 노래를 통해 전해지는 전승을 통해 시에나이트가 추측하는 장면이다.
전설에 따르면 ... 아버지 대지는 생명을 창조하지는 않았으나(생명은 우연히 발생했다.) 그에 만족했고, 매료되었으며, 그 기이하고 방종한 아름다운 것이 자신 위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보살폈다. 그러다 인간들이 아버지 대지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대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물을 오염시키고 지표면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을 살해했다. 대지의 억세고 단단한 피부를 뚫어 구멍을 내고 맨틀의 피를 흘리고 뼛속에 담긴 달콤한 골수를 쪽쪽 빨았다. 그리고 인간의 힘과 오만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오로진이 아버지 대지조차 용서할 수 없는 잔악한 짓을 저질렀다. 대지의 유일한 자식을 죽인 것이다. ... 그의 사납고 맹렬한 분노가 다섯 번째 계절, 즉 붕괴의 계절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발현되어 거의 모든 생명들이 죽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반전은 소름끼친다. 반전은 평범한 반전, 이를 테면 죽었는 줄 알았는데 살아서 나타난다던가 하는 그런 류의 반전을 반전시키는 거다. 죽은 자가 털어놓는 그 엄청난 일 그 배후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말해 봐라. 달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어떻게 2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