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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도서] 빼앗긴 자들

어슐러 K. 르 귄 저/이수현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소설은 상당히 사회 정치적인 소설입니다. 훌륭한 SF 들이 그렇듯이 르귄의 소설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사고 실험을 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없습니다. 완전히 대립되는 사회 시스템을 가진 두 개의 쌍둥이 행성이 있습 니다. 그들은 서로의 달을 지켜보며, 그 달의 세계는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제됩니다. 생각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두 행성은 200년전부터 착취적 무역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왕래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냉전중이었던 70년대 미국과 소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스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상대편의 시스템이 형편없다고, 여기가 낙원이라고 학습되었습니다. 한 체제가 변했던 건 지구라는 단위의 피할 수 없는 연결, 영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에서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들이 있을까요. 일부는 아직도 그들의 배고픈 세계가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을 우상화하고 관료체제를 이상화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이미 혁명은 실패한 것이지요. 착취자는 자본가에서 관료로 이동했을 뿐 더 큰 권력이 민중의 삶을 흔들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자본과 소유가 주는 윤택함까지 빼앗기고 그 윤택함에 오염될까 폐쇄된 사회에 유폐된 그들의 사회가 우리 눈엔 디스토피아로 보입니다. 이렇게 스탈린식의 무력 통치 체제는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가장 대표적이죠.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거기에 이슬람적 극단적 여성 차별주의가 결합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슐러 K 르 귄은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선/악 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합니다. 두 개의 쌍둥이 행성이 추구하는 사회는 극단적 아나키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를 닮아 있지만, 그 두 개의 사회가 지향하고, 살아가는 방식은 앞에서 본 디스토피아들과는 다릅니다. 각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단지 좋다 나보다로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층위의 속성들이 존재합니다. 오도니즘이라 불리는 아나키즘은 아나레스의 황폐하고 삭막한 행성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오도니즘은 말하자면, 공산주의 체계의 통찰을 제시한 마르크스의 이념을 맑시즘이라 일컫는 것처럼, 아나키즘의 탄탄한 이론적 토대를 쌓고 실천적 삶을 살아간 여성 혁명가 오노의 이름을 딴 사상입니다. 실제 아나레스라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된 사회를 보지 못했지만 후대의 세대들은 그의 사상을 쌍둥이 행성에 집단 이주하여 그들만의 '낙원'을 건설함으로써 오도의 사상을 실천한 '유토피아'를 실현합니다.

이론적으로 오도니즘은 아름다운 사회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공산주의도 아름다운 사회이듯이요. 공산주의에 부패한 관료와 학살을 취미로 삼는 전제 정권이 마치 필요충분처럼 따라다니지만, 오도니즘에는 소유도 권력도 정권도 법률도 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오도니즘의 이상에 부합하도록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소유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의 이름이 주민번호처럼 유일합니다. 이름은 중앙컴퓨터에 의해 주어지고, 그 이름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남녀 구분 없는 이름을 받고, 똑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제도라는 것이 없으니 결혼도 없습니다. 섹스는 남녀 남남 여여 등 자유로우며, 두 사람이 서로 함께 살기로 하면 반려가 됩니다. 반려 관계는 단지 둘 사이의 관계로 아무 제약없이 언제든 깨질 수 있습니다. 일은 PDC라고 불리우는 중앙통제 센터의 컴퓨터에 의해 할당받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승낙하고 원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유지될까요? 죄를 규정하고 심판하는 법률과 제도가 없다면, 어떻게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러한 사회가 가능이나 할까요? 이렇게 많은 질문에 대해 르귄은 매우 상세하게 이러한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설계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사회가, 조직이 혹은 그룹이 그들 범죄자들을 자연적으로 축출해낼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강간을 저지른다면 그는 마을 사람들 중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 혹은 집단에게 맞습니다. 그래서 범죄자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소'라는 곳에 유치시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이 소유를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사기 같은 것은 범죄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옷창고에 가면 옷이 있고, 식사는 공동체에서 제공합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의식주를 해결하고 문명 생활을 하기 위한 모든 노동활동은 디브랩이라는 중앙할당 기관의 컴퓨터가 할당하고 힘든 일은 자원하거나, 1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순번제로 배당됩니다. 그마저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함께 살지 못하게 되지만 말이죠.

물리학자인 쉐벡은 오도니즘의 사상에 조금의 의심도 없는 시스템에 충성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외롭습니다.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유일한 노학자는 노쇠했고, 그가 몸담은 중앙연구센터에서는 그의 동시성 이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를 발탁해서 중앙연구소에 데려온 사불은 정부도, 권력구조도 없는 이 아나키스트 사회 시스템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뻔뻔하게 우라스에서 몇십년전 출간된 논문을 표절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나레스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고, 쉐벡을 자신의 소유처럼 만들어 그의 아이디어와 이론을 훔칩니다. 쉐벡이 저항하자 그를 내칩니다. 권력 구조 자체가 불가능한 이곳 중앙연구소에서 사불은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권력 구조가 없는 사회에서 그는 어떻게 그 권력을 획득했을까요. 그의 권력은 공공의 견해라는 인간 정신의 비겁함에서 힘을 얻는 것이라고 쉐벡의 친구는 데세르는 단언합니다. 그 공공의 견해는 개인의 정신을 억압함으로써 오도니안 사회를 지배하는, 공인된 적도, 용인될 수도 없는 정부입니다.

상호의존과 자발성에 기반한 사회는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아나레스 행성에서 물질적 결핍보다 더 큰 결핍은 그 사회 전체에 만연된 폐쇄적이고도 일관적인 배타성입니다. 친구의 영향과 중앙연구소의 관료주의를 겪으며 그는 서서히 깨달아 갑니다. 오도와 그의 이념을 따른 초기 이민자들이 세운 생각의 벽에 아나레스 전체가 매몰되어 있다고요.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원했던 오도의 저작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여 읽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애초 오도가 이상화했던 사상과 완전히 대치된다는 것을요.

사불에게 밉보인 쉐벡의 동시성 이론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불 역시 그의 새로운 이론이 비실용적이라고 출판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쉐벡의 반려는 그를 사불과 공동저자로 하도록 설득합니다. 설전끝에 논문은 사불의 칼날로 누더기가 된 채로, 사불의 이름과 함께 출간됩니다. 이 누더기 논문은 우라스 행성의 학계에 보내는데, 쉐벡은 손상되지 않은 원본을 필사하여 자신과 편지로 의견을 교환했던 우라스의 과학자 아**에게 보냅니다.

대기근 동안 사랑하는 반려와 갓 태어난 딸과 헤어지는 시련은 결속에 의해 지탱되는 이 사회에 대한 그의 시각에 영향을 줍니다. 그들의 자유, 일을 하지 않을 자유, 원하는 일을 선택할 자유, 거부할 자유, 이 모든 자유들이 실상은 인간 결속과 상호 협력에 기반한 오도니즘 사상이 뿌리박힌 사회에서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발성의 원천이 자발적 거부로 인한 피해, 혹은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자발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대기근으로 인한 약 두 달간의 자원 요청에 응할 때만 해도, 그는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갓 태어난 딸과 반려 타크베르와의 행복한 시간을 뒤로 하고, 멀리 떠나야 하는 일은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라고요. 거부할 수 있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요.

"생존하기 위해, 삶이 계속되게 하기 위해 아나레스 인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 어디에라도 달려가 필요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습니다. 대기근으로 인한 인원감축에서 사불의 영향력은 쉐벡을 밀어냈고, 반려는 또다른 자원을 위해 행성의 반대편으로 떠났습니다. 남겨진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어.라고요. 쉐벡은 절망합니다. 반려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습니다.

눈물나게 절절한 이별과 아픈 재회의 장면은 아름다울 만큼 가슴아픈 닥터지바고의 한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잠시동안 아주 잠시동안만 헤어져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잠시의 일을 끝내고 왔을땐 반려가 떠난 후였습니다. 왜! 어째서 광속의 우주 여행이 가능한 시대에 아무리 낯선 행성의 털북숭이 인간이라고 하나, 그들에게 스마트폰은 커녕 유선 전화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은 이별은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게 행동하는 개인에 대한 사회의 시선, 그러한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사회규범과 만나 강제되고 있었다는 걸 참담한 이별의 끝에서 깨닫게 됩니다.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 점이 최악이었다. 타크베르가 필요했던 것이다. 굶주림을 막는 일에…… 그녀의, 그의, 사딕의 굶주림을 막는 일에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는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한 것,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사회가 곧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책을 포기했고 사랑과 아이까지 포기했다. 한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포기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쉐벡은 서서히 아나레스 행성이 스스로를 가둔 벽을 깨달아갑니다. 그리고 그 벽을 부수기로 작정합니다.
"억압해 눌러서 아이디어를 으깰 수는 없어. 무시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지.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하고 있는 짓이 바로 그거란 말이야!"

그들은 개인의 행동을 비판할 때 '소유주의자'라는 말을 일종의 욕처럼 씁니다. 인공 언어인 그들의 언어에는 욕이 없습니다. 소유주의자, 착취자, 그들의 언어가 부정적일 때는 늘 우라스 사회의 특성들을 향해 있습니다. 혁명이란, 진정한 오도니즘은 타성을 깨고 현재 상태를 전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쉐벡은 그렇게 믿습니다. 그와 그의 반려 그리고 몇 안되는 자발적 '조직'은 소외되고 무시됩니다. 같은 종족이지만 대이주 이후 8(확인)백년간 한 번도 상호 접촉이 없었던 두 행성의 주민이 처음으로 벽을 깨고 만나는 과정은 순탄치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도착합니다. 아나레스의 달, 200여년 전 갈라져나온 아나레스의 착취자들이 여전히 소유를 위해 인간을 착취하는 야만적인 곳,

우주선 승선부터 쉐백은 넘쳐나는 물질, 포근하고 부드러운 잠자리와 의류, 매끌매끌하고 반짝거리는 벽을 비롯한 그 모든 풍요로움에 큰 충격을 받습 니다. 이 소설은 아나레스와 우레스를 교차하며 쉐벡의 삶과 의식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우라스와 아나레스 사이를 왕복하는 화물 우주선에 승선하여 우라스로 향하는 장면이 처음 장면입니다. 이질적인 환경과 문화에 처음으로 접한 후 불안하고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상을 내리고, 연구직을 주고 하인이 딸린 호화로운 방을 내주고 환대하는 과학자들과 지내면서, 점차 자신이 이곳의 모순, 책에서만 보았던 호화로운 물질 세계의 허망함과 착취자들의 모습 속에 자신이 갇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동시성 이론과 연속성 이론을 합쳐 새로운 일반 시간 이론을 완성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착취자들의 나라에 호락호락 그 이론을 풀어놓지는 않습니다. 그의 일반 시간 이론은 앞으로 헤인 시리즈의 주요 기기인 앤서블을 완성할 혁신적인 이론입니다. 이것을 손에 쥐는 자가 우주를 재패할 것입니다. 그를 초청한 나라는 누가 봐도 북미를 모델로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오도니즘의 사상을 잇는 탄압받는 민중의 평화적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쿠테타 정권이 지배하는 벤빌리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쉐벡은 분노합니다.

“당신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당신네 보잘 것 없는 ‘법률’과 총이나 폭탄의 ‘힘’을 엔트로피의 법칙이나 중력의 힘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까? 그보다는 좀 나을 줄 알았는데요.”

“전체를 볼 수 있으면 언제나 아름답게 보이는 거야. 행성, 삶……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돌멩이가 보이겠지. 그리고 매일 매일 삶은 힘겨운 일이고, 당신은 지치고 패턴을 잃어버리지. 거리가, 간격이 필요한 거야.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려면 달로 보면 돼.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려면 죽음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보는 거야.”

“시간의 흐름이 인간 의식의 산물이라면, 과거와 미래는 마음의 기능이다. 선(先) 연속성론자, 케렘초 가라사대.”

"오도가 쓰기를 ‘소유의 죄의식과 경제적 경쟁의 짐에서 벗어난 아이는, 필요한 일을 하려는 의지와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능력을 지니고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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