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품있고 해학적인 르 귄의 글은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세상의 생일> 서문에서, 그의 헤인 우주관에 대해 단편집, 자신히 딱히 그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며, '나는 그 안에서 우왕좌왕했고, 그 뒤로도 계속해 체계 없이 우왕좌왕했다.'고 밝힙니다. 르 귄의 다른 글에서도, 인물들을 먼저 떠올리고, 그들을 조금씩 구체화시키면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풍성한 은유로 가득찬 그의 글에서 소설이란 그렇게 플롯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많이 느낍니다. 실제로 방대한 헤인 우주 시리즈를 읽다보면 르귄의 세계관이, 그가 소설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들의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배, 소외, 문화적 충돌, 험난한 여정, 드러나는 진실 등, 그가 평생을 통해 조금씩 확장해간 우주는 광선검과 첨단 우주 병기들이 활개치는 액션 어드벤쳐적 무협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가정 하나가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SF 책을 찾아 읽는 독자임에도, 아니 어쩌면 과학적 사고를 기반한 SF라는 장르에 심취하기로 작정한 독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회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이 드넓은 우주에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한다면 이라는 가정은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어떤 먼 미래, 혹은 어떤 먼 과거 광속의 여행이 가능한 시대를 또다시 가정합니다. 이런 가정이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그리고 어디까지가 과학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렇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광속 여행, 현실에서는 그 존재 여부조차 확인이 불가능한 지구 유사 행성 등을 가정하면서도 르 귄은 아인슈타인이 사람은 빛보다 빨리갈 수 없다고 했던 과학적 제약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인 우주인들은 광속에 가까운 여행까지만 허용됩니다.
그러자니 우주는 너무 넓습니다.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광속의 우주선 내에서조차 몇 세대를 거쳐야 탐사가 가능합니다. 행성간 여행에서 빛의 속도로 몇십년은 단거리에 불과합니다. 헤인 우주 속에서 웜홀이라는 편리한 반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세계에는 앤서블이라는 동시 통신기기가 존재합니다. 이 기기의 탄생에 관해서는 [빼앗긴 자들, the dispossed] 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쌍동이 행성 아나레스와 우레스, 아나키스트/아키스트, 황폐함/윤택함, 빈곤/풍요, 상호결속과 신뢰/착취와 지배 로 대비되는 두 사회의 벽을 허물고자 했던 한 위대한 과학자가 '일반 시간 이론'이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두 행성 양쪽 모두에게서 유폐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바로 앞에 소개한 소설입니다. 같은 반칙이지만, 말하자면 성간 여행을 비행기 여행처럼 묘사하는 편리함보다는 훨씬 덜 편리한, 섬세한 설정이 필요한 장치지요. 자기 작품을 끝없이 비판해온 르귄은 이 앤서블에 대해서도 정보가 즉각적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다소 시니컬한데요, 특히 이러한 최첨단의 앤서블이 인터넷보다도 오래되었고 훨씬 빠르다는 아이러니를 스스로 지적합니다. (참조 세상의 생일 서문).
"나의 우주에서는, 여기에서 지금은 거기에서 옛날이고, 그 반대도 성립하며, 이는 역사를 혼란스럽고 쓸모없게 만드는 데 아주 좋은 방법이다."
(So in my universe, as in this one, now here is then there, and vice versa, which is a good way to keep history from being either clear or useful.)
아무튼 르귄의 재치있는 유머관은 그의 여러 에세이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근 르귄의 에세이들이 간간히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까요. 특히 과거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실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 에세이 집 [밤의 언어]에서도 이러한 르 귄 작품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견해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세계관을 지킨 덕분에 헤인 우주에서는 슬프고도 아련하면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을 다룬 서사가 가능해집니다. 우주인은 '우주를 가로지를 때마다 아인슈타인의 시간 지연 효과 덕분에 나이를 거의 먹지 않(출처: 세상의 생일 서문)'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몇 년을 여행하는 사이 그들이 떠난 행성은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이 흐르는 결과가 되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무리해서라도 앤서블을 등장시키지 않고는 논리적이고 정교한 서사를 쓰기 어려웠을 겁니다.
세상의 생일은 여러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르귄의 단편집입니다. 이 책의 모든 소설들은 우리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체제 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낯선 세계를 보다 편견없이 관찰하기 위해, 지구를 떠나 먼 우주 속의 어떤 행성을 그립니다.
"이 책의 일곱 단편들은 하나의 패턴을 공유한다. 이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내면에서 혹은 관찰자를 통해(이들은 토착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와는 다른 사회의 사람들을 드러낸다. 이들은 우리와 생리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느끼는 방식은 우리와 같다. 먼저 차이를 만들어내고?낯설게 만들기 위해서?그다음 인간의 감정이 격렬한 호를 그리며 뛰어올라 그 차이를 메우게 놓아둔다.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상상의 이런 곡예에 매혹되고 만족감을 느낀다."
첫번째 이야기인 <카르히데에서 성년되기>는 단편집 [바람의 열두방향]에 수록된 단편 [겨울의 왕]과 장편 [어둠의 왼손]을 잇는 작품입니다. 이 행성 게센인들에게는 생리적인 성이 없습니다.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대신 케메르 라고 불리우는 발정 기간이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없이 살다가 이 기간이 되면 남성 혹은 여성으로 변신합니다. [겨울의 왕]에서 애매하게 시작한 이렇게 낯선 인간들의 세상은 [어둠의 왼손]에서 구체화됩니다. 연맹(에큐멘)에서 게센과 친교를 맺기 위해 주인공 겐리 아이를 파견합니다. 이 때 처음 도착하여 외교 활동을 벌이는 무대가 [카르히데]입니다. 여기서 [어둠의 왼손]에서 그 지긋지긋한 폭설과 맹추위를 뚫고 남극 탐험과 같은 혹독한 여행을 하게 되는 에스트라벤을 만납니다. [어둠의 왼손]은 많은 주제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인 두 행성인 사이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겐리는 전에 게센에 간 적이 없었지만, 나는 <겨울의 왕>이란 단편소설에서 게센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 첫 번째 방문에서 어찌나 서둘렀던지 나는 게센의 성별에 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었다. 꼭 관광객처럼 말이다. 양성 소유자? 거기에 양성 소유자들이 있었나?"
게센인의 생물학적 성적 특성은 낯선 환경에 홀로 맞서게 된 테라(지구)인 겐리 아이의 시각에서 보다 구체화됩니다. 장편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의 눈에 비친 외계인 겐리 아이는 기이한 인간인 거죠. 주기적으로 오는 케메르 상태에서만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되고, 케메르 상태에서만 성적 생식의 욕구를 느끼는 그들에게는 , 항상 남성인 상태에 있다는 것이 항상 케메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하고, 기이하고, 변태적인 인물이라는 거죠. 반면 남성 인간인 겐리 아이에게는 양성인 게센인들도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혹독한 겨울 행성의 국경 탈출을 현지인 에스트라벤과 함께하면서 여행 도중 케메르 상태를 목격합니다. 오해와 혼란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공공의 이상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곳곳에서 뭉클합니다.
작가는 [어둠의 왼손 ] 서사에 집중하느라 이 특이한 양성인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케메르 상태에 만족할만한 묘사가 부족 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양성인 사회의 케메르에 대해 확대경을 대어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세상의 생일]에 첫 번째 순서로 실려 있습니다. 1990 년대 작품입니다. 20 년간 게센인들이 속삭이던 비밀을 털어놓은 셈이죠.
화로 라는 공동체 사회에서 성장하는 아이가 처음으로 케메르를 맞이하여 당황하고 이를 통과하는 성장 소설입니다. 지구에서라면 난교 파티를 연상시키는 케메르 집단이 서로를 욕망하고, 윤리관에 맞닥뜨리고, 사랑합니다. 누구나 한 번을 통과해야 하는 성인 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라고 하는 풋풋하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