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에서인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어슐러 K 르 귄의 <아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연상되었다. 얼굴에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을 지닌 채 태어난 릴리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아무런 병도 갖지 않고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유전자가 구성될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한다. 누구나 쉽게 태어나기 전 유전자 지도를 스크리닝하여 사회가, 부모가, 그리고 시대적 유행이 요구하는 완벽한 인간이 되도록 자르고 붙여넣기가 가능해진 시대, 하지만 우리가 현재에 그토록 우려하고 있는 일이 일어난다면, 부의 편중에 의해 소외된 낙오된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
완벽한 인간을 만들려는 노력이 기형적 사회를 만들었음을 깨달은 릴리는 다른 행성에서 새로운 '이상향'을 건설한다.
올리브가 태어난, 모두의 어머니가 릴리인, 릴리가 세운 이 이상향에서 릴리 이전의 과거, 릴리 이전의 역사는 잊혀졌다. 망각에 뿌리를 두는 이상향은 진정한 이상향일까? 르귄의 또다른 소설, 장편 <빼앗긴 자들>에서 세운 아나키스트들의 이상향 아나레스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버리고 떠난 세상 그 역사와 과거를 잊음으로써 행복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들에게 성년식이 의미하는 것은 이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 말고, 불행하고 슬픈 시초지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벨라스에서 마을 공동체가 행복의 댓가로 고통받고 외면당해야 하는 아이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과는 달리, 이 행성에서 행복의 댓가로 개인의 희생어라는 낡은 윤리적 딜레마를 요구하지 않는다. 지옥에 가서 고통을 확인하고 그러한 시초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초지로 순례를 떠난 사람들은 많은 수가 되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다. 그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고통과 슬픔, 비탄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처럼.
어쩌면 사랑은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일 지도 모른다. 슬픔과 아픔과 비통이 없는 사회가 의미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독점적이고도 배타적인 그런 강렬한 사랑의 부재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