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한국에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라는 책이 번역된 적이 있고, 그 때 책은 감명깊게 읽은 작가여서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시간이라는 주제를 물리학적으로 풀어가는데, 이 양반 글쓰는 솜씨가 물리학을 굉장히 뭐랄까 시적이고 철학적인 문체로 쓰는 관계로, 과학책을 싫어하는 독자에게도 어필이 된다.
제목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인데 영어 제목은 <The Order Of Time>이다. 제목을 영어처럼 지으면 뭔가 아주 딱딱해지니까 조금 도발적인 제목으로 흐르는 시간을 흐르지 않는다로 바꾼 것 같은데, 본문에서는 실제로 시간을 우리가 시간에 대해 알고 있는 방식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유효한 것 같다.
가만히 멈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시간이다. 친숙하고 은밀하다. 시간이라는 도둑은 우리를 끌고 간다. 1초, 1분, 1시간, 1년의 쏜살같은 흐름이 우리를 삶 속으로 밀어넣었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끌고 간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산다. 우리 존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의 애가哀歌는 우리의 영양분이 되고, 우리에게 세상을 열어주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편, 편안한 요람이 되어주기도 한다. 세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시간이 이끌어가는 일들을 펼쳐나간다.
작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부정하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어디서나 동일하게 가고 있다는 착각을 깨는 것부터 시작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그렇고 다른 SF 소설에서 우주 공간에서 시간 흐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간극으로 인해 상실과 아픔을 겪는 스토리를 통해, 빠르게 이동하는 우주선에서의 시간은 지구에서의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많이 접해왔다. , 특히 어슐러 르 귄은 이 주제를 그의 헤인 시리즈에 여러가지 변주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해왔다.
로벨리는 지구상 시간이 어떻게 우리의 개념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여러 방식으로 보여준다.
시간은 장소마다 다른 속도로 흐른다.
우주선을 타고 멀고 먼 다른 우주로 가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간차는 아주 매우 미세해서 우리가 느낄 수 없다. 느낄 수 없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소리들, 이런 것들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한달 가까이 (해외 여행 후 에방 차원에서)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미세한 것의 힘을 강력하게 느끼게 된다. 같은 장소라면 높은 곳의 시간이 낮은 곳의 시간보다 더 빨리 간다. 그러므로 동일한 척도 하에서 산에서는 평지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평지에서는 더 적은 시간이 흐른다. 같이 태어났어도 평지에 산 사람은 더 짧은 시간을 살아 젊고, 산 위의 사람은 더 오랜 시간을 살아 더 늙었다. 그런데 저자는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이러한 시간 지연 현상이라고 말한다. 사물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아래쪽일수록 시간이 지구 때문에 느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정식은 열역학 제2법칙(에너지 보전의 법칙)인데, 이 방정식에서 세상을 찾아낸 과학자가 루트비히 볼츠만(1844-1906)이다. 그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로벨리는 볼츠만의 이론을 한묶음의 카드로 설명한다. 카드들이 색깔별로 특별하게 정렬해놓았다면, 이는 엔트로피가 낮은 구성이다. 이 카드들은 다시 하트와 스페이드로만 구분되어 있다면 또 다른 구성으로 특별하다. 이렇게 어떤 특성을 기준으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특수성이 생기지만, 모든 카드를 다 구별하면 그 어느것도 특별해지지 않는다. 볼츠만은 엔트로피를 우리가 세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구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이라는 것을 증명해 냈고, 과거의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사물의 미시적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나 현재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원인이 결과보다 앞서지 않고, 미래와 과거는 현재를 중심으로 대칭적이다. 즉 볼츠만의 연구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희미한 시선에서 나온다는 것이며, 이것이 시간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약화시킨다.
게으르면 시간이 더 빨리 흐른다.
멈춰있는 사람과 빠르게 왔다갔다 한 사람 역시 다른 길이의 시간을 산다. 멈춰있으면 더 많은 시간을 살아 더 늙게 되고, 빠르게 달린 사람은 더 적게 살아 더 젊게 된다. 더 많이 살았다는 것은 더 많이 호흡하고, 세포들이 더 빠르게 교환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다. 비행중의 1970년대에 시간과 지상의 시간을 초정밀도로 재어 비행중인 시계가 덜 갔다는 것을 증명했다. 앞의 높낮이의 경우에서도 그랬지만 우리의 천재 아인슈타인은 초정밀도 시계가 나오기 전 이를 알아냈다. 우주의 시간 구조는 아버지이자 형제이고 동시에 삼촌이 되는 근친 관계의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의 왕가의 가계도처럼 꼬여있다. 우주의 시간 구조 역시 원뿔형으로 이루어져,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인 우주의 사건들 간의 순서를 정의하는 특수상대성이론이 우주의 시간 구조가 친척 관계와 같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A의 미래는 B의 과거이고 A의 과거는 B의 과거가 되는 복잡하고 이상한 관계다. 시공간은 시간 구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의 층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광원뿔들이 교차하며 흐트러진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고요 속에서 아무런 신체적 경험이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우리는 즉시 어떤 시간이 흘렀다고 가정한다. 우리 내면에서 흐른다고 인지한 시간도 우리 내면의 움직임이므로 시간이 흐른 것이다. 뉴턴은 정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외에 또 다른 시간,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진짜’ 시간이 있다고 보았고,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의 움직임마저 얼어붙어버려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게 그리고 동일하게 계속 흐른다고 보았다. 공간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동일하게 개념을 적용했다. 뉴턴은 두 물체 사이에 ‘빈 공간’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간은 사물의 정렬 상태일 뿐이므로 사물이 없고 이 사물들이 확산되어 있지 않으며 접촉하지도 않으면, 공간도 없는 것이다. 뉴턴은 사물은 어느 한 ‘공간’에 위치해 있고, 이 공간은 사물을 치워도 빈 상태로 여전히 계속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이론으로 통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