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판을 엎어라’지만 내용은 잔잔한 책이다. 이세돌의 바둑입문과 성장, 우리나라 바둑계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세계대회 결승전 마지막 대국보다 입단결정국이 더 떨렸던 것 같다는 이세돌, 대회 우승은 경력의 차이라 할 수 있지만 프로 입단 여부는 ‘신분’의 차이라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세돌은 바둑을 두는 듯 잔잔하게 자신의 짧지만 강렬한 삶을 회고하고 있다.
프로기사 이세돌에 관한 다소 성의없는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현재 20여개월 넘게 국내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거나 수십연승을 이어가고 있다거나 하는 객관적인 사실 때문이 아니라, 보기에도 연약한 그가 호남의 외딴 섬 비금도에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일찌감치 바둑계에 투신했으며 큰 기복없는 자기관리로 또 하나의 ‘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많은 바둑인 또는 국민들로부터 너나할 것 없는 전면적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연약한 개인이 아니라 ‘판을 뒤엎은’ 대인이며 이 책은 그의 젊은 자취를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바둑이라는 종목(아시인 게임의 정식종목이 된 바 있으니 스포츠의 한 분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듯)이 갖는 범아시아성과 가로세로 19개씩의 줄과 공간으로 엮어내는 우주적, 철학적 깊이에 대한 그만의 해석과 에피소드를 만난다. 그는 지난 뻬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국가대표 주장으로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었다. 그의 설명과 철학산책을 따라 바둑의 묘미를 간접체험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작은 즐거움이었다. 구리9단과는 운명의 10번기를 맞이하고 있다.
중반이 강하지 않은데 종반만으로 이길 수는 없다는 얘기를 이창호9단에 대한 세간의 평과 함게 싣고 있는데 짧지만 강한 깨달음을 준다. 중반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는 바둑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에 해당되는 얘기. 그의 지적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창호9단을 끝내기에만 강한 기사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같다.
바둑의 프로기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잡으며 어떻게 감정절제와 자기관리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바둑인이 아니더라고 크게 관심이 가는 문제일 듯하다. 그의 마인드컨트롤을 엿보고 있자니 ‘생각버리기연습’의 류노스케 스님이나 ‘화해’의 틱낫한 스님, 그리고 다 버리고 떠나신 우리의 법정스님 들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이세돌의 마인드컨트롤법은 첫째, 대국 전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안정된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서 노력한다. 둘째, 마음에 동요가 생기면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놓아 둔다. 셋째,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끈기를 가진다. 뭇 영적인 스승들의 깊은 사상과 다르지 않다. 잡념이 떠나지 않더라도 ‘오면 그냥 흘러가게 놔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바둑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한 마디 문장으로 정리한다. ‘호랑이는 사냥을 할 때 큼직한 사슴이든 작고 약한 토끼든 최선을 다해서 뒤쫓아 먹잇감을 구한다.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고 상대가 누구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바둑을 두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판을 엎은 작은 거인 이세돌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힘찬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