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과 파양호(鄱陽湖)
1360년, 남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주원장은 진우량(陳友諒)이라는 강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진우량은 강서·호남·호북 일대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다.
진우량은 강한 수군을 거느리고 채석에서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와
응천부(應天府)를 공격하면서 주원장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빼앗으려 했다.
이에 주원장은 급히 부하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모두들 갑론을박 의견이 분분한데 모사 유기(劉基)만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 주원장은 다른 부하들은 모두 내보내고 홀로 남은
유기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유기는 이렇게 말했다.
“적들은 먼 길을 행군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기지 못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적군의 약한 고리를 들이치기만 하면 쉽게 진우량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기의 말을 들은 주원장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주원장은 부장인 강무재(康茂才)를 불러 계책을 꾸몄는데,
강무재는 진우량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집으로 돌아온 강무재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늙은 노복에게 명해
진우량의 진영으로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진우량은 강무재의 말을 믿고 늙은 노복에게 이렇게 물었다.
“강공(康公, 강무재)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강동교를 지키면서 대왕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늙은 노복의 대답에 진우량은 다그쳐 물었다.
“강동교는 어떤 다리인가?”
“목조 다리입지요.”
진우량은 전군에 출발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강동교를 향해 갔다. 그
런데 약정한 곳에 이르러 보니 강동교는 목조 다리가 아니라 돌로 만든 석교였다.
그런데 이때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양 기슭에서 주원장의 복병이 달려나왔으며
포구에서는 수군이 뛰쳐나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진우량의 몇만 대군은 갈팡질팡하다가 달아났는데
창칼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이가 부지기수였다.
이로 인하여 주원장의 명성은 더 높아졌으며,
실패를 싫어하는 진우량은 3년 후에 60만 대군과 전선을 거느리고
홍도(洪都, 강서성 남창시)로 진격해 왔다.
이에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홍도를 구원하러 갔다.
그러자 진우량은 홍도를 포위했던 군대를 철수시키고
수군은 모두 파양호(鄱陽湖)로 철수시켰다.
주원장은 즉시 파양호의 출구를 봉쇄하고 진우량과 파양호에서
결전을 벌일 태세를 취했다. 진우량은 크고 높은 배들이 많았지만
주원장은 모두 작은 배들뿐이어서 전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흘 동안 주원장의 군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자 주원장은 수하 부장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공을 가하기로 했다.
그는 배 일곱 척에다 화약을 가득 싣고 각각의 배 뒤에는 작고 빠른 배를
달게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동북풍이 세차게 불자 결사대는 배에 불을 달고
진우량의 배들을 향해 돌진했다.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드는 배와 충돌한 적선들은 불바다에 휩싸였으며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진우량은 포위를 뚫고 달아나다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즉사했다.
이듬해에 주원장은 장사성의 할거 세력을 소멸했다.
그리고 서달(徐達)을 정로대장군으로, 상우춘(常遇春)을 부장군으로 임명하여
25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감행했다.
두 달 후에 서달의 군대는 산동을 점령했다.
1368년 1월, 주원장은 응천부에서 황제로 즉위했으며 국호를 명(明)이라 했다.
그가 바로 명나라 태조(太祖)이다.
같은 해 8월에 명나라군이 대도를 공격해서 점령하자 원 순제는 상도로 도망쳤다.
97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던 원나라는 그렇게 멸망했다.
포양호(鄱阳湖)는 중국 최대 규모의 담수호이자 중국 10대 호수 중 하나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지만, 지속된 극심한 가뭄과 건조 현상으로
물이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단다.
400여 년 전 명(明)나라 시대 건설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무려 3Km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
역사는 기록으로 우리에게 만가지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