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사이에는 갑을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사랑의 크기에 차이가 있다면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을의 입장이 되는 것 같다.
더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인내하고, 이해하고, 참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멀어질 사이임을 불현듯 느끼고 그 멀어짐을 감내할 수 없는 사람은 한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폴의 입장이 너무나도 이해가 갈 것이다.
사랑에 목 매보지 않은 사람은 폴을 보며 답답하고 미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데이트는 하지만 밤에 자신을 찾지 않는 남자친구,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 온 남자친구의 예상되는 약속 취소의 전화, 누구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누구보다 나를 외롭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는 폴의 연애는 미련한 것이 맞다.
폴이 완강한 태도로 로제에게 이별을 고했다면 로제는 아쉬운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폴은 로제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로제와 함께 한 수많은 시간들과 그들만의 유대관계, 곳곳에 얽힌 추억은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온 것이지만 그것들에 대해 로제가 느끼는 것보다 폴이 느끼는 감정이 훨씬 깊고 세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에게 다가온 매력적인 청년 시몽이 나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자신을 한없이 외롭게 만들지만 끝없이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서 본인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확신과 사랑을 주는 시몽이 다가와 폴은 스스로 혼란스러워 한다.
개인적으로는 폴이 로제에게 벗어나 시몽을 만나길 바랐다.
로제에게 벗어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힘들겠지만, 그러한 상황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자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로제는 폴과 연애하는 상황에서 사창가의 여자와의 만남을 여러 번 가진다. 그 사실 또한 폴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로제에 대한 마음을 떼지 못한다.
로제에 대한 폴의 마음은 사랑인가, 정인가.
애석하게도 폴은 로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바로 로제에게 돌아간다.
로제가 폴에게 집중해서 서로의 사랑이 행복했으면 정말 좋겠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책의 끝은 늘 그랬듯이 로제가 저녁 약속을 취소하기 위해 폴에게 전화하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폴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것이고, 그녀는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을, 상황을 택한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에 고립되게 만든 그녀가 너무나도 안타깝다.
하지만 사랑의 선택은 A 아니면 B 같이 심플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 마음이 공감되기도 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미련 없이 뒤 도는 방법도 알아야 할텐데 사람 마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마음이 하는 말과 머리가 하는 말이 다르다.
그래서 부디 바라는 것은 내 마음이 하는 말과 머리가 하는 말이 같게 해주는 사랑을 만나고 싶다.
사랑을 하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큰 행운이겠지.
마지막 저자의 말을 보며 재밌었던 부분은 이렇게나 복잡한 사랑에 얽힌 심리를 써낸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은 열정만 믿는다고 하는 말을 보며 저자도 이런 사랑을 해보았기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것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사랑을 믿지 않고 복잡한 사랑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런 심리묘사를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과 사랑을 해보았다면 더욱 재밌게 읽을 것이다.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