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교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을 나누어
각각의 역할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저자는 이번에는 이원론의 주장을
보다 심도있게 파고들면서 이원론의 문제점을 말한다.
생각해 보니 이와 비슷한 논쟁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바로 이황과 이이의 이기론에 관한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는 정신이고, 기는 현실이다.
이황은 이기이원론이었다.
이황에게 이와 기는 다음과 같았다.
이는 완전하고, 기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황의 관심은 이의 완전성에 있었다.
그래서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줄여서
주리론이라고도 한다.
이이는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이었는데
이는 통하는 것이고, 기는 국한된 존재라고 했다.
둘은 늘 같이 존재하며 기가 없이는 이가 없고
이가 움직이려면 기가 움직어야 한다는
일원론적인 사상을 말했다.
이이는 이와 기 중에서는 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이의 사상을 주기론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둘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달랐다.
이황은 지극히 추상적으로 갔다.
이는 완전하기에 현실을 바꾸려면
이를 가꾸어서 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정신을 깨끗하게 수련하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며 이의 정점에는
군주가 있으니 군주가 깨끗해지면
신하가 깨끗해지고, 신하가 깨끗해지면
백성이 깨끗해진다는 말을 했다.
이이는 기를 중요시 했기에 현실의 문제에
지극히 개혁적이었다.
수미법이라든지, 십만양병설이라든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백성이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즉 기, 현실을 바꾸면
이는 당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옳을까?
난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둘의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황의 생각을 따른다면 지극히 근본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부분,
혹은 미덕, 도덕이라는 부분이 깨끗해진다면
얼마나 이상적인 세상이 올까?
하지만 정말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미래에 이상적 세상이 올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어쩌면 종교에서 말해야 할 도덕은
이런 이상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이이를 생각해 보면
결국 이는 기와 하나이므로
기, 현실을 바꾸면 이는 자연히 바뀐다는
현실적인 개혁가나 정치인, 그리고 일반인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밤에 길이 어둡다면 가로등을 하나 더 설치하면
밝은 길을 다닐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은 근본으로 돌아가 모두 착하면
밤길이 어두워도 무서워 하지 않고
다닐 수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문을 열어 놓아도 도둑이 없는
정말 이상적인 세상이라면,
밤길이 어두워도 덜 무서워하지 않을까?
근본과 도덕적인 문제는 이런 것 같다.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이 어렵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설명도
결국 믿음을 요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그 외에 부분에서 종교가 할 역할은
그런 이상적인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살 수 있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닐까?
둘의 논쟁은 어쩌면 이황과 이이의 논쟁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럼 둘은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