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후 커피를 보약처럼 마시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뜬금없이 내려오는 서류 뭉치와 오전 내내 씨름하다보면 어느덧 점심시간.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 구내식당에서 조미료가 듬뿍 들어가 맛이 더욱 진한 국과 벽돌처럼 단단해진 생선을 뜯으며 오전에 받았던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온 전화와 뜬금없이 내려온 서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새 점심시간은 끝.
이번엔 커피를 건강보조제처럼 마시고 오후 일을 시작한다.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전화는 걸려오고 파도가 부럽지 않게 서류뭉치가 밀려온다. 뽀얗던 얼굴이 개기름으로 범벅 되어 화장이 슬슬 지워질 때 쯤, 하나 둘 씩 퇴근을 하고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안도감을 느끼며 남은 일을 해치운다.
퇴근 길, 오늘도 아이들과 저녁을 먹지 못했다는 속상한 마음을 안고 걸음을 재촉해서 돌아왔지만 집은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난장판, 식탁위에 얼룩진 국물 자국, 왕왕 시끄럽게 울리는 텔레비전 소리에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시작하는 나의 스위트홈. 아이들 숙제 봐주고 어린이집에서 쓴 식판 닦다보면 어느 새 밤 열 시, 우리 아이들이 키가 작은 건 일하는 못난 어미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새 나라의 어린이답게 일찍 자자고 아이들을 구슬리다가 먼저 잠드는 정말 못난 어미.. 그게 바로 나다.
얼마 전 사회적 기업인 어떤 단체의 파티에 초대 받았었다. 그곳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신 나게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힘차게 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뼛속까지 느끼고 돌아왔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남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나의 직장. 하지만 이곳은 터무니없는 루머가 자주 휘몰아치고, 암 진단을 받는 환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스트레스 구덩이인 살벌한 곳 일 뿐이다.
지칠 대로 지친 직장 생활, 누구는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싫으면 그만 두면 될 거 아니냐고.
그만 두면 나도 좋고, 애들도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생계가 위협 받는다.
어떤 연예인이 말했다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하며 오늘도 나는 일터로 향한다. ‘아무 일 없지 않지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3년차 직장인 설대리의 짜증과 눈물, 분노와 기쁨’을 그린 설레다의 「아무 일 없는 것처럼」은 11년차 직장인인 나에게도 공감을 주는 시원한 책이다.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일러스트는 고달픈 직장인의 마음을 달래주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위안을 갖게 해준다.
특히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명언은 루돌프 사슴코보다도 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주워 먹으며 천리를 내달려서 한참 후에 누군가에게 도착한 발 없는 말은 처음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명언 또한 동해 물과 서해 물이 마르고 또 마를 때까지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