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 릴리는 저 눈사람을 다시 냉장고 속에 넣지 않을 것이다. 그냥 밖에 놓아둘 것이다.
동심을 잃어서가 아니다. 녹는 것은 녹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녹아내리다가 마침내 소멸하는 과정을 이제 마음으로 지켜볼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도 눈사람이 분명 여기에 있었음을 기억 할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게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여기 작게 기록해 둔다.” (본문 중에서)
이른 오후, 목덜미가 뜨거워질 만큼 볕이 강했던 날 지하철에서 덤덤하게 읽다가 책의 맨 마지막장의 몇 개의 문장을 읽다가 코끝이 시큰해졌다. 녹아 없어질 눈사람이나 언젠가 스러질 나의 인생이나 같다는, 39년을 살아오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사실 때문에.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소설을 읽었다.
정이현 작가의 글은 좋아해왔기 때문에 잔뜩 기대하며 책장을 열었다. 게다가 이번 소설집은 표지가 참 예쁘게 나왔다. 하지만 뭐가 문제였던 건지 몰입도도 떨어졌고, 모임에 몇 번 불참한 사이 친밀해진 사람들 사이에서 머쓱하게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행간에서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저 마지막 문장들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보게 만들어줬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여자와, 냉커피를 마시는 남자가,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춘천의 연인이, 이혼한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여자아이가, 그제야 보였다.
무뎌질 만큼 무뎌져 더 이상의 아쉬움도 없어 ‘안녕, 잘 지내. 행복하길 바라’, 쿨 하게 인사하고 헤어지는 길. 묘한 후련함과 서운함에 자꾸만 흘끔흘끔 뒤돌아보는 연인처럼 두 번이나 읽고 책장을 덮었는데도 자꾸만 그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