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바깥이 여름이라도 스노우 볼 안은 항상 겨울이다. 모래가 달궈져 발을 데면 비명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어도 스노우 볼 안은 항상 눈발이 날린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인데, 저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조금 서글펐다.
사실은 내가 스노우 볼 안에 갇힌 사람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내가 앓고 있는 병과 무관하지 않다. 나의 병은 한여름 해수욕장 썰물에 밀려오는 플라스틱 음료수병 같이 찾아왔다.
이번 단편집을 읽으며 자주 절절한 마음이 들었는데, 농도 짙고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 때문일수도 있지만, 내가 아픈 상황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김애란의 소설은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손으로 읽을 때가 더 좋다. 찬찬히 필사를 하며 읽다보면 소설 속 풍경 안에 내가 스민다. 이번 단편집은 특히 더 좋았다. 몇 번이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읽었다. 너무 좋아서, 김애란 작가가 조금 얄미웠다. 어쩜 이렇게 잘 쓸 수 있지!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입동’을 읽으면서는 내 아이들이 떠올라 저릿했고, ‘노찬성과 에반’을 읽으면서는 아버지를 잃은 가여운 아이의 미래를 그려보고 마음 아파했다. 먼저 공무원 시험에 합격 한 후 결국 동거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건너편’의 도화를 보고서는 ‘그래 잘 생각했다’고 토닥였고, ‘어디로 가고싶으신가요’의 명지씨에게는 다정히 다가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장미색 비강진에 연고를 부드럽게 발라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생동감 흘러 넘쳐서 우리나라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인간극장이나 다큐3일에 등장하는, 실존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만들어 놓은 일곱 개의 방을 들락날락 하다 보니 어느 새 가을이 되었다.
눈으로 한 번 읽었으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손으로 한 번 더 읽어보려고 한다.
김애란의 소설은 나를 이런 식으로 고단하게 만든다. 자발적인 고단함. 사각사각 연필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가 꾸며 놓은 방 안을 구석구석 살 펴 볼 수 있어 즐거운.
하루키는 역시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김중혁은 역시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김애란은, 무조건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장편이, 김중혁의 장편이, 김애란의 장편이 좋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단지 나의 취향이 그렇다는 거다.
짧은 호흡, 긴 여운.
김애란 작가를 나는 아주 많이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