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다 지로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집안이 몰락하는 충격을
겪으면서 불량소년이 되고, 야쿠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경험을 소설 「당하고만 있을 쏘
냐」와 「찬란한 황금빛」에 쏟아 부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 중에서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문장을 읽고 소설가의 꿈을 품었다고 한다. 만약 아사다 지로가 유년기처럼 유복한 집안에서 그저 순탄하게만 살았다면 아마 소설가는 되지 않았을 것이고, 소설가가 되었다고 해도 그저 그런 사소설을 쓰다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유복한 집안의 자제가 한 순간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 겪었을 정신적인 충격, 그리고 생활의 고
통들이 그의 피와 살이 되어 분명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앞이 캄캄하고
죽을듯한 괴로움의 시간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아닌 ‘약’이 되기도 하니까.
아사다 지로를 소설가의 길로 이끈 '가와바타 야스나리' 역시 오사카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네 살이 되기 전 부모를 잃고 백내장으로 시력을 상실한 할아버지와 함께 자란,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작가이다.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작품에 녹아있는 두 작가의 시선은 서로 판이하다.
대표적인 허무주의 작가로 불리며 서늘한 허무주의가 작품에 녹아있던 가와바타 야
스나리와 달리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는 정(情)과 따스함, 그리고 눈물이 공존한다
우락부락한 야쿠자도 긴자 거리의 마담도 그의 소설 속에서는 ‘인간미’를 갖춘 사람들로 표현
된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 중에서 악인은 없다. 모두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아갈 뿐
이다.
그가 쓴 소설들의 진짜 주인공은 ‘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쉽게 읽히는 스토리이지만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고 ‘제각기 다른 인생’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 좋은 연못 같지만 사실은 아주 깊은 호수인, 쉽게 읽히지만 깊이는 한없는 깊이를 가진
것이 그의 소설이다.
‘진짜배기 철도원’ 호로마이 역의 오토마츠씨.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딸과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 나도 철도원인데, 사사로운 집안 일로 눈물을 보이겠습니까?”라며 ‘외투 자락을 쥐어뜯으면서도 끝내 눈물 한줄기 흘리지 않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철도원.
‘너절한 일’을 하는 야쿠자 모 대조직의 말단 사무실에서 돈을 받고 뒷일을 하는 다카노 고로가 돈을 받고 위장 결혼을 한 상대가 죽게 되어 생전엔 본 적도 없는 자신의 부인의 시신을 찾으러 가는 내용의 러브레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아홉 살 때 몰락했다던 집안과 그 당시 어린 아사다 지로의 심정이 반영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악마.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당숙 집에서 살게 된 주인공 누쿠이. 아버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의 부인 구미코를 임신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지만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게 되어 어린 시절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고향에 미련을 버리게 된다는 내용의
츠노하즈에서.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견뎌내다 보면 문득 메마른 감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거울을 보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지’하고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중얼거림을 내뱉기도
한다. ‘예전엔 안 그랬었는데.. 작은 일에도 설렘을 느끼고 늘 새로운 일을 기대했었는데..’라
며.. 세상 모든 것이 장난감이 되고 웃음거리가 되는 아이들은 감성도 풍부해서 작은 일에도
노여움을 타고 울기도 한다. 가끔은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19세 이상 성인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어서 거절하겠지만
그 감정들만큼은 그리운 것이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들은 내게 어릴 적 ‘감정’들을 되살려준
다.
『동세대의 작가, 편집자들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갖가지 특별한 계층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어떤 문학수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하였다.작가로서 내가 가진 희귀한 경력은 아마 앞으로도 내게 큰 용기를 줄 것이다.』 한 장편소설의 후기에서 그가 밝힌 말이다. p.300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택에서 유서도 남기지 않고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아사다 지로는 자신의 불운한 시절들을 '어떤 문학 수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두 작가의 작품 모두를 사랑한다.
그러나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은 역시 아사다 지로 쪽인 것 같다.
그를 보면서 나도 힘을 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