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하정우를 언제부터 눈여겨보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유명한 중견 배우 김용건의 아들이라는 그의 프로필에 놀랐던 기억은 난다. 그리고 영화 《국가대표》에서 영어 대사를 원어민 수준으로 소화해내 놀랐던 기억도..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타인으로 빙의 되어야 하는 배우에게는 그들만의 감각, 느낌feel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당연히 연기는 느낌feel로 하는 줄로만 알았다. 작가가 써준 대사를 달달 외우고 감정만 잡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온 것이다.
그러나 하정우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연기는 철저히 계산된 노동이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색이 다른 볼펜으로 별표를 치며 공부한 흔적이 남은 대본을 보며, 나는 이것이 책을 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인지 아니면 진짜 그의 손길이 담긴 것인지 순간 헷갈렸다. 배우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그는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는
없다.’고 말하며 ‘운동선수처럼 독하게 훈련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라고 고백 했다. 그런 자세로 영화를 찍고 나면 몸과 마음에는 잔여물이 생긴단다. 또래들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할 테니 술이나 도박 혹은 호화로운 생활로 그런 것들을 해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림을 선택했다. 그저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마음의 잔여물들,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 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개운해졌다고 그는 말한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나는 다시 한 번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하정우, 이 배우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기를 느낌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계산해서 하는 것이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그것도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꽤 세련된 그림을. 다른 배우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2003년 수채화로 그림을 시작한 그는 2010년 3월에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세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정도면 그저 단순히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보기 어렵다. 한 번쯤은 배우의 지명도로 전시회를 열 수도 있겠지만, 세 번씩이나 연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한 인터뷰에서 하정우는 ‘내게 주어진 달란트가 쌀이라면 배우는 밥을 짓는 것이고 그림은 남은 쌀로 술을 빚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하정우를 미술평론가 김종근 교수는 “하정우는 연기를 안 했다면 화가가 됐을 재목”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견디기 위한 방법이 있다. 어떤 사람은 가방을 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 시간쯤 숨이 턱까지 찰 때까지 달린다. 또 어떤 사람은 스피드를 내며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한다. 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나의 생각들을 비워내면서 힘을 얻는다. 하정우의 경우에는 그것이 그림인가보다. 이 남자.. 참 퇴폐적이면서 건전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그 자신감에서는 땀 냄새가 났다.
노력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 최선을 다 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정우는 그의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참 매력적인 남자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과감히 표현하고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