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편지를 쓰지 않기 시작한지 꽤 되었다. 내가 중학생일 적만 해도 손 편지는 흔한 것이었는데 강산이 한 번 반, 변하는 동안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그 때만해도 친구들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고 모 방송국에서는 예쁜 엽서전을 열 정도로 라디오 DJ에게 엽서 혹은 편지로 사연과 노래를 보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펜팔도 꽤 유행해서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단행본이나 잡지의 뒤쪽으로 가면 항상 펜팔 친구를 찾는 사람들의 사연을 수록해놓았었다. 지금은 손 편지는커녕 e-메일도 사용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카카오 톡처럼 단문의 메시지를 전송해서 서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고 싶지만 지금은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도 없거니와 다들 바쁘게 지내서 직접 글씨를 써야 하는 편지는 상대방이 수고로울 것 같아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우정국 시대의 편지글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편지를 보낸 헬렌 할프는 평생 뉴욕에서 글을 썼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자신이 영국의 고서점과 주고받은 편지를 출판하면서 유명해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종결된 지 4년지 지난 어느 날, 헬렌 한프는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영국의 고서점 ‘마크스 서점’(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는) 의 광고를 보게 된다.
희귀 고서적을 모으는 데 취미가 있는 이 젊은 작가는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의 목록을 보내면서 구매 의사를 밝힌다. 영국의 마크스 서점에서 그녀에게 답신을 보내면서 그들 사이의 편지는 시작된다.
이들의 편지는 고객과 상인 사이의 일종의 청구서로 시작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우정을 교류하는 통로가 된다. 헬렌은 전쟁 후 영국이 음식을 배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크스 서점 직원들에게 식료품을 보내고, 서점 직원들은 선물을 받고 굉장히 감사해한다.
사람은 자신이 힘든 시절에 도와준 사람을 잊지 못하기 마련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대에 얼굴도 모르는 낯선 외국인의 호의는 그들에게 상당한 기쁨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1949년 10월 5일에 시작된 편지는 1969년 10월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 그들은 계속해서 책과 선물과 사진을 주고받지만 단 한 차례도 직접 만나지는 못한다.
헬렌이 영국행을 계획했지만 치과 치료와 이사 등의 문제로 번번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나고 날이 지나고 변하는 그들의 편지 내용은 친근하고 다정하고 따뜻하다.
만난 적이 없는 그들의 우정은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과의 그것보다 더 진실하고 깊었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간격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편지를 읽다보니 헬렌 한프라는 무명작가는 꽤 괜찮은 사람 같다. 멀리 떨어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격의 없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는 일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심 없이 가까운 친구들에게라도 선물을 사서 소포로 보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게다가 그녀의 유머 감각은 시니컬하면서도 상당히 유쾌하다. 사람을 피식 웃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사람 같다.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한비야, 영화배우 김효진 등 유명 인사들이 추천한 책인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따스함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 낙엽 아래서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