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검초의 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 거품으로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어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된 것을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다는 이유를 들며 겨우내 장복하는 아버지. 「저녁의 게임」
어떤 사람을 표현할 때 혹은 성격을 파악할 때 그가 먹는 음식만으로도 짐작 할 수 있다.
주위에 아메리카노만 혹은 카페라떼만 고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상관관계가 없어 뵈는 재료들을 섞어 정체불명의 약을 만들어 먹는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답답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입가에 침 찌꺼기가 들러붙어 있는 담뱃내 나는 늙은이를 연상시킨다.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을 읽으면서 내내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약 끌이는 냄새, 딸이 저녁밥을 지으면서 만들어내는 생선 냄새. 냄새는 소설에 더 깊숙이 빠지게 만들어 준다. 음울하고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
「저녁의 게임」 은 심각한 당뇨병자인 아버지, 그래서 이상한 약재들을 구해다가 직접 약을 달여 마시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돌보는 딸이 매일 같이 벌이는 저녁 식사 후의 상대의 패를 아는 화투 놀이를 그리고 있다.
//딱딱한 껍질 속에서 죽은 동생의 환상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단 첨가된 춘화와도 같은 여인과의 정사를 안고 달팽이처럼 한껏 움츠리며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오뚝이들을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도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역시 나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다. 다리가 맥없이 후들거렸다.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가슴은 금방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릴 듯 건조해져 있었다. //
하늘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고 태양은 곧 쪼개질 듯 하얗게 빛나고 있던 날, 심한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던 한 소녀가 무심코 오뚝이가 가든 찬 장난감 가게를 들여다본다.
그 안에 있는 휠체어 탄 여인은 소녀가 살던 집, 소아마비를 앓던 동생, 가정부였던 새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그 때부터 소녀는 여인의 완구점에서 오뚝이를 사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우연히 집을 나간 새어머니를 보게 되고 그녀가 임신한 채로 춤을 추는 홀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날 밤 소녀는 완구점 여인을 찾아가고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온다. 다시 찾아간 완구점은 다방으로 바뀌어 있고 소녀는 여전히 품 안에 고통과 좌절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아픔을 털어내려 한다.
「완구점 여인」
휠체어를 탄 여인의 완구점에서 오뚝이를 사 모으는 소녀. 소녀는 고통을 떠안고 살기로 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소극적이진 않으리라. 버석버석한 메마랐다는 그녀의 가슴이 더없이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삶의 진창에 빠져 상처 입고, 끈적끈적한 고름을 쏟아내던 시기는 지난 것 같아서. 상처 받아 생긴 소녀의 고름이 꾸덕꾸덕 말라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처음엔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하는 소설이 난해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음울한 소설 속의 분위기가 오히려 나를 개운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다가 맨 다리로 걷는 듯한 느낌이다.
감각적이고 시적인 문체는 오정희 만의 매력이다. 그러나 그런 섬세함은 오히려 독자를 심란하게 만든다. 단어 하나하나가 예리한 비수가 되어 가슴속까지 무섭게 파고든다.
「완구점 여인」은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저녁의 게임」은 197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데 신춘문예 당선 당시 그녀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고 한다.
평론가들은 그녀를 두고 ‘섬세한 내면의 정경 묘사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내면의 고뇌를 자의식적인 측면에서 예리하게 묘사’하였다고 평한다. 나는 이런 거창한 단어들이 나열된 설명을 이해하진 못한다. 그러나 오정희의 글을 필사하면 유독 정경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안다. 그녀의 글을 필사하다 보면 영화를 보는 듯 객관적으로 위치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음을 느낀다. 오정희가 표현하고 있는 거리가, 방 안이, 냄새가 그대로 느껴져서 주인공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듯하다. 마치 주인을 따라다니는 애완견처럼, 그들의 눈치를 보며 곁에 앉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