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엄마의 집

[도서] 엄마의 집

전경린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사실 나의 엄마가 전형적인 한국여자는 아닐 것이다. 엄마는 독립적이다. 직업이 있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기사를 가위로 오려가며 신문을 열심히 읽고 이혼을 했고 애인도 있고 지각도 있다. 엄마의 이름은 노윤진, 영어로 쓰면 세 글자에 모두 n이 들어간다. 나는 이따금 엄마를 미스 엔이라고 부른다.


전경린의 『엄마의 집』을 두 페이지정도 넘기면 ‘사실 나의 엄마가 전형적인 한국여자는 아닐 것이다. 엄마는 독립적이다.’로 시작하는 문단이 나온다. 이 다섯 문장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제길, 또 페미니즘 타령이겠군. 설마 386이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


내 예상은 생각보다 쉽게 들어맞았다. 페미니즘적 요소들과 386, 동성애 등등이 시골 잔칫날이면 꼭 등장하는 마요네즈로 뒤범벅된 ‘사라다’처럼 뒤섞여 있었다.

‘나는 엄마가 바라는 소녀적 이미지가 못마땅했다. 그건 수동적인 헤어스타일이다. ’라거나

‘사실 여성호르몬만으로는 단순할 뿐 아니라 진부하다.’란 문장을 읽을 땐, 마요네즈가 뭉친 사라다 속의 감자를 먹는 듯 느끼하고 비위가 상했다. 2007년에 출간된 작품인데 주인공들은 90년대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던가!


386세대인 아빠와(운동을 하던) 그림을 그리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호은, 그녀가 주인공이다. (관점에 따라서 호은의 엄마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호은의 엄마는 운동권이던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고 호은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활동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호은의 엄마는 남편과 이혼 후 집을 나가고 호은은 외할머니 손에 자란다.

대학생이 되어 호은은 엄마와 함께 살게 되지만, 두 모녀는 서로의 감정을 탐닉하고 방어하면서 위태로운 평온함을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은의 아빠가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나타난다. “승지를 네 엄마한테 좀 맡겨라.”라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소설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본적인 가족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사랑을 주지 못해서 혹은 받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외로워하면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방어기제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양성애자면 어떨 것 같냐는 딸의 물음에 ‘어떻긴, 그런가보다 하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엄마도, 유년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은 엄마에게 그런 도발적인 물음을 하는 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비정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몇 년 만에 겨우 만난 딸에게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았냐고 묻는 아빠도 위선자로 느껴졌다. 아내와 외도 상대자의 선물을 같은 것으로 고르고, 딸과 친구를 대동하고 부인 모르게 다른 여자를 만난 것, 마땅히 해야 할 경제활동을 자신의 신념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응하지 못하는 무책임함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승지가 진짜 자신의 딸이 아니었던 것처럼 어쩌면 승지 친엄마와의 외도 역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이 깨지고 친딸은 방치해두었으면서 남의 딸을 거두어 기른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순 없었다.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니 이건 페미니즘 이야기도, 386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주인공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정당한 노동마저 물질에 농락당하는 것이고 착취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무능력한 남편을 떠나 자립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호은 엄마, 그 사이 외할머니 댁에서 외롭게 자라야 했던 호은, 나이가 들어도 예전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방랑하다 시골에 정착하려는 호은의 아빠. 다른 시각에서 이들을 보니 인간의 가치관이나 신념이라는 건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호은과 그녀의 엄마가 아닌 호은의 아빠로 보게 되었다. 모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은 장본인.


“글로벌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물질에 농락당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려면, 마음과 생각 속에서 우선 착취의 사슬을 끊어야 해. 말하자면, 더 가질 수 있고 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공존의 선을 가져야 하는 거야. 진짜 삶은 욕망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가 아니라, 욕망이 멈추는 공존의 선 위에서만 가능해. 너도 그 선을 찾아야 하고. 모든 것에 가격이 붙어 있는 이 세계에 속지 마. 때가 되면 네가 가격의 질서에서 벗어나 살게 되기를 바란다.”


부자는 타락한 사람이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조직일 뿐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386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는 변했고 마찬가지로 변해가는 사람도 많다. 예전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많다.  물질에 농락당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농락하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정말 위험한 것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삶에 기생하고 심지어 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호은 아빠처럼.


승지가 엄마의 집에서 나오던 날, 호은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척아줌마(호은엄마)는 타락했다고. 화가이면서 생계를 핑계로 진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승지의 생각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런 인물들을 창조해 낸 것은 시대가 변했어도 같은 생각,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그 신념들은 자식을 통해 대물림되고 그래서 세상은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읽히는 소설이라고 해서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집』을 읽으며 새삼스레 떠올린 사실이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