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안하고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TV를 켠다. 왁자지껄 산만하게 진행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과자 한 봉지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생각 없이 보고, 먹고, 의미 없이 낄낄낄 웃는다.
그러나 그런 날은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져 기분의 급 하강을 경험한다.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는 일도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데, 수동적으로 뭔가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루함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TV도, 영화도 다른 사람에 비해선 적게 보는 편이다. 부모가 TV를 켜지 않으니 아이 역시 그것에 노출될 기회는 줄어든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아이는 TV보고 싶단 말을 절대 꺼내지 않는다. 으레 집에선 책보고 함께 뒹굴고 노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요놈이 외할머니 댁에 가면 입장이 달라져 당당히 ‘애들이 보는 거 틀어줘, 할머니!’라고 요구하고 든다. 심지어는 디즈니채널을 보다가 집에 가기 싫어진 아이가 ‘오늘은 할머니 댁에서 자고 간다.’며 떼쓰기도 한다.
사람의 머리를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FMRI)로 찍어보면 보는 사람과 생각할 때와 TV를 볼 때, 책을 읽을 때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한다.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볼 때에는 사람의 두뇌는 일부분만 활성화 되지만, 책을 읽을 땐 전면적으로 활성화된다고 한다. 볼 때는 시각 기능만 활용되지만 읽을 땐 상상력과 사고력이 동원되기 때문이란다.
‘단순한 TV’가 ‘단순한 아이’를 만들고 ‘단순한 아이’가 다시 ‘단순한 TV’에 빠져든다.
책을 읽을 때 아이는 우주를 상상할 수도 있고, 감각적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추상적 이념을 생각할 수도 있다. 햇살, 바람, 강물 그리고 어느 이름 모를 동물에 이르기까지 두뇌 속에서 무한한 세상이 펼쳐진다. 그만큼 우리의 뇌세포가 무한히 활성화된다. TV를 볼 때와는 정 반대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이것은 TV라는 전자제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조건 TV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다큐 프로그램이나 남편이 좋아하는 야구 중계를 나쁘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이의 광고와 일부 드라마, 쇼 프로그램은 독을 품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터질 수도 있다. 일단 독이 터져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연예인의 환상을 좇고, 여성들은 신상품을 좇고, 아이들은 시리즈로 나온 장난감을 좇는다.
저자 하재근은 『TV쇼크』통해서 TV의 문제점을 상세히 짚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TV가 편견을 강화하고 원초적이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TV가 아이들에게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적 가치관을 주입한다며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를 언급한다. 재벌집 도련님 앞에서 일반 소시민이 무릎 꿇고 앉는 설정이 등장하고, 재벌과 재벌가에서 시중드는 직원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완전한 종처럼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비친 재벌2,3세들은 성격은 조금 까칠하지만 능력과 리더십이 출중한 것으로 묘사되고, 평범한 여자가 재벌을 만나 상류층으로 입성하게 되며 끝을 맺는 결말을 ‘해피 엔드’로 묘사하여 ‘황금의 세계로 편입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행복이라는 가치관’을 심게 해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TV쇼크』는 단순히 영유아기에 TV를 보면 신경 기능 발달이 저해되므로 시청을 제한해야 된다는 단순한 메시지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로 대부분의 가정에서 영유아들에게는 TV시청을 제한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유아들보다 덜 제재를 받는데, 『TV쇼크』는 그럼으로써 생길 고정관념이나 편견, 연예인 열풍들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물론 TV는 좋은 점도 많다. 책에서 언급된바와 같이 전문가들이 만든 교양․ 다큐 프로그램이라든지, 생활 습관을 교정할 수 있는 유아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등 어떻게 TV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바보상자가 될 수도 있고 백과 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절대 아이 혼자 TV를 시청하게 하거나, 부모가 바쁠 때 TV 앞에 놓고 아이를 방치하면 안 되며 기본적으로 부모가 아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대처법을 내놓고 있다. 장황한 문제제기에 비하면 결론은 미약하지만, TV의 위험성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