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는 영화가 나오기 전 한 번, 나오고 나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읽었다. 물론 영화는 보지 않았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그렸다는 이 소설을, 파격적인 노출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홍보하는 영상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전율하면서 읽은 이 소설에 대한 감흥을 굳이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는 게 가장 솔직한 변辯일 것이다.
좋은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그것을 대중화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반대로 부작용도 속출한다. 수박 겉핥기식의 이해로 단순히 재미있다, 없다 로 나뉘기 때문에 작품을 아끼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른 여름 오후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이적요 시인은 데크 위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괘씸하게 생각해보았지만 곧 시인은 연이어 찾아온 낯선 감정에 놀란다.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았다’고 생각한다.
집 뒤 축대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집으로 들어왔다는 소녀, 은교는 부끄럼도 타지 않고 해맑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시인과 함께 살고 있는 서지우는, 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할 적에 만난 사이다. 두 달 동안 시인의 수업을 듣고 군에 입대한 서지우와 시인은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다. 이혼한 채로 서지우가 시인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도, 십년이 지난 후에도 시인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인의 집을 드나들던 파출부가 아들을 만나러 외국으로 떠난 후 서지우는 새로운 파출부로 시인이 데크에서 만났던 소녀, 한은교를 집으로 데려온다.
주말에만 청소를 하기로 했던 은교는 곧 주중에도 시인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시인은 소녀를 보며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家’의 저택 같던 자신의 집에도 초롱이 켜졌다고 느낀다.
시인은 은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지만, 자신이 잘 다스리면 되는 감정 정도로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TV에서 서지우의 대담을 시청하게 되고, 하필 그 때 서지우의 차에서 은교가 내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렇지 않게 은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서지우를 보고 시인은 잠자고 있던 자신의 본능이 발화됨을 느낀다.
소설 속에 인용된 독일 작가 실러의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는 말은 소설 『은교』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전율을 느꼈다. 지금은 내 마음대로 수족을 쓸 수도 있고, 원한다면 마음껏 달릴 수도 있지만 그런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바로 영원히 정지된 과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찬란했던 시절은 점점 멀어지고 내 머릿속에서만 빛나게 될 것임을 이미 내 삶에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 Q변호사
사랑이라는 게 어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던가. 영문도 모르고 빠지는 게 사랑 아니었던가. 제 또래처럼 밝게 빛나던 은교에게서 시인은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누이를 떠올리고, 관념 속의 처녀로 여기며 남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한다. 그런 시인을 바라보는 서지우, 둘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간다. 서지우는 은교의 실체 뿐 아니라 이적요의 변화하는 모습도 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흔히 자신이 사랑에 빠져 있음을 비밀로 간직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랑이라는 건 당사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불빛’을 항상 내뿜는 것이니까.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은 이적요마저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하는 쉬운 착각에 빠지고 만다.
변해가는 스승을 붙잡으려 한 것인지, 은교를 붙잡으려 하는 것인지 서지우는 점점 혼란스러워 하고, 급기야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기 시작한다. 시인은 서지우를 멍청하다고 생각했고, 서지우는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던 스승에게 반기를 들고 싶어 했지만 시인이 은교보다 사랑한 것은 서지우이고, 서지우 역시 스승을 누구보다 사랑한 이였다. 은교는 그저 시인에게 본능의 발화를 일으키는 상징일 뿐.
처음엔 오후 7시쯤의 해와 한 낮의 해가 서로 경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들이 갖고자 한 것은 은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서지우와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만 현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 다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질투심이 꼭 정열의 증거는 아니라고 했다. 정말 질투심이었다면, 나의 질투심이, 은교를 선생님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질투심인지, 아니면 선생님을 은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질투심인지, 그것이 아니면 재능에 있어 선생님의 그림자조차 따라갈 수 없는 고통에 따른 질투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 - 서지우
“서지우는 안으로 쌓은, 사람에 대한 나의 담장을 조금씩 허물었다.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고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열심히 내 집에 드나들었다. 나는 드나들다 말겠거니 하고 모르는 체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는 시종여일했다. 재주가 없는 대신 심성이 착하고 따뜻했다. 아들과 살았어도 그만은 못했을 터였다. 어떤 가족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때마침 나는 가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거의 유일하게 그를 믿을 수 있었고, 살붙이 같은 정을 느꼈다. 단 하나의 가족이었고, 모든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을 내보여도 되는 유일한 장신구였다. 다만 그가 제자로서 문학판에서 쑥쑥 뻗어나가지 못하는 게 늘 마음 아팠다. 멍청하다고 욕을 하고 온갖 구박을 하며 위악적으로 굴어 봐도 밭이 근본적으로 부실하니 소출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그는 여전히 ‘내 새끼’였다.” - 이적요
스승과 제자가 아닌 부자지간이 되 버린 두 사람, ‘나의 당나귀’로 ‘아들’을 죽이려던 시인은 계획이 성공하자 그 후론 은교가 있다는 것도 잊고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서지우 역시 본능적으로 시인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사랑하던 이에게 버림받은 듯 서럽게 울며 생을 마감한다.
싱싱하던 꽃도 어느 순간 이그러지듯, 단단했던 시인의 육체도 점점 사그라든다.
은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시인과 서지우 사이에 은교가 없었더라면 시인은 금세 그대로 시들어 갔을 테다. 은교는 시인에게 잠자고 있던 본능을 일깨워주었고,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빛바래고 나약해졌는지 깨닫게 해주는 현실적인 존재였다.
“할아부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는 거예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 진짜로요. 끼어들 틈도 없었는걸요.” - 한은교.
『은교』라는 제목 때문에 처음엔 사랑과 욕망에 초점을 두고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은교는 어느 새 들러리가 되고 시인과 서지우의 애증관계만 보였다. 그러면서 시인도 이해되고, 서지우도 이해되고, 은교도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소설가 박범신은 작가의 말에서 ‘내가 미쳤다. 이 소설을 불과 한 달 반 만에 썼다. 폭풍 같은 질주였다.’고 고백했는데, 이토록 묵직하고 섬세한 소설을 한 달 반 만에 집필 하다니...
작가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던가! 올해 읽은 책 중 단연 최고라고 손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