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멋지게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을 선보인 뒤 직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웃는 상상, 그래서 나를 못살게 군 직장 상사가 살살 웃으며 커피 한 잔을 건네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상상. 나는 이런 상상의 행위가 직장 생활 중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는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역시나 헛된 꿈일 뿐,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상상하는 일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통쾌할까? 혹시 원하는 대로 세상을 얻더라도 그만큼 잃어야 할 그 무언가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더글라스 케네디의 장편소설 『파리 5구의 여인』은 상상하는 일을 그대로 재현해주는 여인과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된 대학교수가 주인공이다. 오하이오 영화학과 교수인 해리는 제자와의 스캔들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파리로 쫓기듯 건너간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파리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곳이었고 오히려 그곳에서 더 큰 절망을 느끼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친구의 소개로 사교 살롱을 찾게 된 해리는 그곳에서 마지트라는 이름의 매력적인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부터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미 발표된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책들처럼 『파리 5구의 여인』역시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점심 식사가 나오기 전에 잠깐 읽으려고 몇 장을 들췄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몽땅 읽어버렸으니.
나는 이 책에 빠져든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로맨틱 스릴러물이기 때문에? 읽는 순간 소설에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더글러스 케네디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이유들 때문에 이 소설에 빠져 들었을까? 아니면 밑바닥까지 곤두박질 한 그에게 찾아오는 갖가지 불행과 억울함이 마법 지팡이를 두드리면 호박을 마차로 만들 듯, 한순간에 쉽게 해결되는 주인공 해리의 상황이 못내 부러워서 빠져 든 것일까.
초등학생이 아닌 국민학생이던 시절 패스트푸드가 그려진 홍보지를 보면서 ‘햄버거 나와라 얍’, ‘치킨 나와라 얍’ 이라고 중얼거렸던 적이 있다. 그런다고 해서 실물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같은 주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입 밖으로 꺼내는 행동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꽉 차오르는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파리 5구의 여인』을 읽으면서 그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나의 중얼거림을 누군가가 듣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과 햄버거를 뚝딱 내 앞에 가져다주었다면, 대신 하루의 일정 시간을 그에게 주어야 했다면, 어린 시절의 나는 순순히 승낙했을까.
원하는 것을 뭐든지 이뤄주겠다며 마법 지팡이를 가진 사람이 성인이 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나의 것들 중 일부를 나눠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