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거리를 걷는 일을 좋아한다. 쇠락한 옛 읍내 길은 상당한 매력을 품고 있다. 지금은 빛 바란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분명히 아이들로 북적였을 역 앞의 문구점, 초라하지만 한 때는 때를 밀기 위한 사람들로 왁자지껄했을 대중목욕탕 앞을 지날 때에는 기억이라는 터널에 빨려 들어가는 것 만 같다.
나라는 사람은 서민가정에서 자라서 그런지 화려한 건물과 빌딩이 즐비해있는 서울 생활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시골뜨기 성향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두려워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시간은 시골의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르니까. 사실 나는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고 촌스러운 사람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쫓기듯 살다보면 기진맥진해서 만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몸과 마음이 바싹 메마르게 되는데,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을 읽으면 연한 연둣빛의 새순이 촉촉하게 올라오는 듯 감성에 물기가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특별하지 않은 듯해서 더 특별하다.
『우연한 산보』의 스토리 구성은 ‘고독한 미식가’때 함께 작업한 쿠스미 마사유키가 맡았는데, 그는 이 작품을 연재하면서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사하지 않는다, 옆길로 샌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주인공 우에노하라는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라고 말하는데, 문자 그대로 태평한 미아처럼 산책을 하는 줄거리를 가진 작품이어서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보다는 풍경 묘사가 주를 이룬다. 여기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 빛을 발하는데, 실감나는 세밀한 묘사와 정감어린 필치가 보는 이로 하여금 말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향수에 빠지게 만든다.
쿠스미 마사유키는 자신이 찍은 수많은 사진 자료와 함께 문장을 다니구치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총 8편의 작품과 산책 원작 작업과 원작 뒷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한 권의 책에 모두 실려 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환상적인 그들의 호흡을 8편만으로 보기엔 대단히 아쉽다.
원작 뒷이야기에서는 쿠스미 마사유키가 5화의 밤거리 표현이 대단했다며 다니구치 지로의 실력을 극찬한다. ‘한 컷 그리는 데 하루 걸리는 것이 당연’한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면서, 사진보다 훨씬 치밀하고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며 그의 그림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쏟아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밤에는 모두 잠을 자잖아.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불을 끄고 이불안에 들어가 의식을 잃는거지?”
후훗. 맞는 얘기지만 잘 생각해보면 참 기묘하단 말이야. 저 창안에도 저 집안에도 저 아파트에도 집집마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거잖아. 피곤에 지쳐 잠들거나 일찍 일어나기 위해 잠들거나 행복하게 잠이 들었거나 자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재워졌다거나 자서는 안 되는데 잠들어 버렸거나 슬픔에 빠져 잠든 사람도 있겠지. 외로워서 불을 켠 채 잠든 사람도. 하지만 모두 지금은 자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난 그 잠든 사람들 무리 속을 홀로 걷고 있는 거지.
나 역시 우에노하라의 독백과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장면이 ‘우연한 산보’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검정색으로 처리된 하늘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생생히 그 광경을 독자의 머릿속에 되살리게 만드는데다가 나의 경험과 그림이 맞물려 잊혀 진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사방을 혼자 걷고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내일의 업무를 생각하는 대신 책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일상에서 벗어난 관념적인 의견을 혼잣말처럼 내뱉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묘한 일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만화책은 비닐로 덮인 채로 출간되는 경우가 많은데,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만은 비닐이 덮였더라도 고민하지 않고 구매한다. (소설도 그렇겠지만) 사실 만화의 경우 소장가치를 따질 수밖에 없는데, 그의 작품만은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다. 나를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실망은커녕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게 된다. 섬세한 그림과 휴머니즘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매번 내 감성을 자극하고 마음 저리게 만든다. 『우연한 산보』는 쿠스미 마사유키와 다니구치 지로의 환상적인 궁합을 엿볼 수 있어 충분히 소장가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