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전, 나는 여섯 명이 함께 쓰는 대학병원의 병실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기쁨과 자부심으로 발광(發光)하고 있었다. 병실에서 산모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내 옆의 중년 부인은 난소를 제거 하는 수술을 받았고, 나머지 분들은 항암 치료 중이었다.
시꺼멓게 색이 바란 목련 같은 그들 곁에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눈부시게 새하얀, 갓 핀 목련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선 그토록 환했던 나의 감정은 집에 돌아오자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으로 변질됐고, 남편은 산후 우울증이란 이름으로 포장하고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합리화시켜주었다.
13일이 지나자 정신이 들기 시작했고, 뭔가 읽을거리가 필요했다. 어떤 책을 읽을까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문득 ‘문태준’이 떠올랐다.
『먼 곳』을 고른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가진 그의 시집들 가운데서 손이 가는대로 집어 들었을 뿐이다.
거실 큰 창 앞에 있는 소파에 누워 그의 시집을 읽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은 몇 편의 시를 읽자 금세 잊혀 졌고, 그의 시들은 출산 전보다 더 진하게 느껴졌다. 『먼 곳』에 실린 「바위」라는 시의 마지막 연을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불쾌감의 원인을 찾게 되었다.
바위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 지 마흔 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 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 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마흔 몇 해가 되고 ․ ․ ․ ․ ․ ․
시간은 강물이 멀리 넘어가듯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었던 지난 시간이 흘러갔음을, 그리고 내 앞에는 무럭무럭 커가는 아이를 감당할 일만 남아 있음을, ‘그 무수한 순간들’이 지나가버리면 자식을 두고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었음을, 이것이 불쾌감의 정체였다.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 찾아간 작명소에서 농담처럼 들은 ‘자식은 이 세상에 놓고 가는 존재’라는, ‘부모는 죽으면서 자식을 남긴다는’ 그 한 마디가 약해진 내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게 내내 마음에 남아 묘한 불쾌감으로 변질되어 나를 눈물짓게 만든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고민이 있을 때 믿음직한 친구에게 담담히 털어놓다가 고민이 해결되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건 주관적이던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객관화되기 때문이리라. 문득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읽고 생각하는 사이, 나의 문제를 객관화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