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나 자신과 비슷한 점이 발견되면, 무작정 호감부터 갖는다.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심 때문이다. 남편은 나와 같은 취향의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늘 말한다. 그건 평범하지 않다는 뜻과 같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를 갖게 되길 기대하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만큼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을-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소설의 주인공의 일부 성향-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은 부부이지만 아이가 없다거나 남편이 게이라거나, 혹은 한참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한다거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이 내는 목소리에서 나와 비슷한 면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런걸 보면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한 것 같다.) 그렇다해도 때론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얼마 전 출간된 (일본에선 2007년에 출간) 『잡동사니』가 바로 그런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좋았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와 휴양지에 있다는 도입 부분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떠오르게 했고, 평생을 말 그대로 책만 읽고 산 기리코씨(주인공 슈코의 엄마)가 등장했을 땐, 이거야 말로 내가 꿈꾸는 삶 그 자체라며 반가워했다.(게다가 그녀는 부유하기 까지 하다!!)
푸켓에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이 어떻게 진전되어 갈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다만 에쿠니의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정사를 동반한 불륜 이야기일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내 예상처럼 정사와 불륜이 등장했지만 수위는 예상 밖이었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들을 이해해야할지.. 나는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과의 관계 특히 연인이나 부부간의 관계만큼은 클래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고 그녀가 창조한 인물들에 매력을 느끼는 나이지만, 이번 캐릭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무리 격한 사랑에 빠져도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좋든 싫든 그 관계는 반드시 변하게 돼요. 하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죠. 그 심리를 이번에는 비교적 직설적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 에쿠니 가오리의 인터뷰 중에서.
『잡동사니』는 푸켓에서 만난 마흔다섯의 슈코와 열다섯 미우미의 1년간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슈코와 미우미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번역 일을 하는 슈코는 엄마(기리코)와 함께 떠난 푸켓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열다섯의 미우미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휴양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들은 귀국 후에도 종종 만나는 사이로 발전한다.
먼저, 쇼코는 결혼 8년차로 남편(하라 다케오)은 방송국에서 일한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가 참으로 기묘하다. (소설 속 인물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쇼코의 남편 하라 다케오이다.)
그녀는 고목에 매미가 붙은 것처럼 남편에게 매달려 살지만 남편 이외의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 뜻밖의 여성이고, 남편 하라는 대놓고 애인을 만나고 다른 여성과 관계를 갖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쇼코가 튀김가게의 젊은 요리사에게 호감 갖는 모습을 보이자 하라는 그녀와 젊은 요리사가 단둘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한다. 집에 일찍 들어온 부인 쇼코를 향해 ‘일찍 왔네. 잠은 같이 안 잤나 보지?’라고 묻는다.
“ 잠은 같이 안 잤나 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
“그렇다면 아무 데도 안 간 모양이네.” 남편은 말했다.
“다음엔 좀 더 멀리 다녀와. 멀리 가면 갈수록 진심을 알 수 있을테니까.”
이런 말도 한다.
“슈코가 누구와 자든 난 슬퍼할 수 없어”
“하지만 난 어느 누구와도 자지 않았어”
“알아”
“당신이 외간 여자와 자면 나는 슬프단 말이야”
“어째서?”
하라는 부인이 외간 남자와 관계를 맺어도 슬프지 않다고 하고, 외간 여자와 자는 것이 슬프다는 부인에게 어째서 슬프냐고 묻는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 쇼코는 이해된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라면 나도 안다. 그 슬픔은 나만의 것이다. 나 혼자 맞서야 하는 것이며 남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쇼코의 남편은 이기적인 것일까, 아니면 자기애가 강한 것일까.
그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순진한 독자였던가!
열다섯의 미우미는 귀국 자녀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풋풋한 나이만큼이나 행동도 거침없는 그녀는 아빠의 가게에서 일하는 와타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에게 먼저 뽀뽀를 할 정도로 당돌하기도 하고, 대담하기도 하다. 푸켓 여행 후 쇼코와 기리코를 만나게 되면서 쇼코의 남편 하라와도 동석하게 되는 그녀는, 곧 하라의 매력에 빠지게 되고 쇼코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첫 번째로 읽었을 때, 남은 페이지수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불안했다. 설마 미우미와 쇼코의 남편 사이에 무슨 일일 벌어질까봐.
아니나 다를까, 하라는 미성년자인 미우미와도 관계를 맺고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나..
평소 독자가 소설가가 만든 인물들에 대해 평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잡동사니』속의 인물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소설을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미우미 아빠의 가게에서 일하는 와타루의 엄마(사야카)가 등장한다. 그녀는 미우미의 엄마(교코)와도 친분이 있는 사이로, 미우미의 아빠(네기시)와 이혼 후 여러 남자와 만나는 쿄코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나도 사야카 씨처럼 한 남자의 여자로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네기시 씨는 살아있으니까 된 거예요. 살아 있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변함없이 보존할 수는 없어요.”
에쿠니 가오리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이것이었을까? 남편이 죽은 후 그를 잊지 못하고 평생 추억하며 사는 사야카는 자신의 집에 그대로 남아있는 남편의 물건들을 ‘잡동사니’라고 말한다. 여러 남자를 만나는 교코는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야카에게 그런 사랑이 부럽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살아 있는 상대에 대한 감정은 변한다고’말한다. ‘사랑은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정말 변하지 않는 사랑은 ‘잡동사니’인 것일까.
“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는 있어도 독차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정사를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독차지하고 싶다면, 원치 않는 것들까지 포함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남편의 여자 친구들이라든지.” (쇼코)
쇼코는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면, 그 움직임마저도 사랑해야 함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나 역시 아무리 사랑해도 서로 다른 인격체를 지닌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독차지할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사랑이 다른 사랑을 찾는 것을 납득할 순 없다.
쇼코는 “비극이 뭔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활 자체가 되어 우리를 붙잡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생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활이 되면 초심을 잃게 된다. 설렘도 잃게 된다. 그 순간 일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쇼코의 남편 하라는 고전적인 결혼 생활을 택하는 대신 자유분방한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인 양.
결혼이 생활 자체가 되어 비극을 만들지 않기 위해, 다른 여자와 잠을 자고, 아내에게도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셈이다. 여행은 여행일 뿐, 돌아올 집은 언제나 있다. 다른 여자와의 하룻밤은 말 그대로 원 나 잇 일뿐, 그 밤이 지나면 부인에게 돌아온다.
나는 여전히 쇼코와 하라와 미우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그들이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그런 행동들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만 간신히 동의할 뿐이다.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의 일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이 쓸모없는 ‘잡동사니’처럼 보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부가 됨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은 진한 키스와 포옹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꼭 두 손을 맞잡지 않아도 둘만의 공기가 있음을,. 그것이 정情이라는 단어로 표현됨을 나는 알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땐 이런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쇼코와 하라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연거푸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정情 대신 열정적인 사랑을 택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무엇보다 쇼코와 하라의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이 사실은 자신들이 가진 사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면, 그 사랑 역시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나를 충격에 빠뜨렸지만, 결국 새로운 시각으로 ‘사랑’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독서의 즐거움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결국 이해하게 될 때 오는 것 같다. 한 동안 이들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