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필사를 굉장히 좋아해요.
필사의 매력에 빠진지는 5년 정도 되었지요.
글을 잘 쓰고 싶었어요. 문학 비전공자의 한계를 갈수록 느끼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문득 신경숙 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베껴 썼다는 기사가 떠올랐어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소설가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과 「완구점 여인」을 차례로 필사하면서 온 몸에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건 그동안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지요.
필사를 해본 사람은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어 있어요.
필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제3의 공간에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것과 비슷해요. 전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을 지켜보지요.
주인공들은 제 앞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세수를 하고 길을 걸어요.
그렇게 차례로 오정희를 신영복을 김승옥을 신경숙을 만났지요.
은희경 작가의 작품은 「소년을 위로해줘」를 부분 필사했어요. 그래서 연우랑 태수랑 채영이는 진짜 제 동생처럼, 자식처럼 , 그 아이들이 제 자신처럼 느껴져요. 은희경 작가의 작품들은 다 읽어봤는데 「소년을 위로해줘」를 필사한 뒤로는 ‘진희’보다 연우랑 태수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갖게 되더라고요.
은희경 작가의 필사 대회 이벤트를 보고 굉장히 반갑고 기뻤습니다.
예전에 부분 필사했던 「소년을 위로해줘」를 찾아볼까 하다가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의 일부를 다시 필사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리와 마리’ 자매 때문이지요.
제가 필사한 부분은 223페이지예요.
늘 그렇듯 연필로 필사했어요. 아이가 초등학생인데 쓰다 남기는 연필이 많거든요.
아이가 어느 정도 쓰면 제가 가져다가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써요.
“지난 봄 마지막으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언니와 가로수 아래를 걷던 일이 떠올랐다. 언니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봄 되면 나무에는 다시 새잎이 나는데, 인간은 왜 그렇게 안 되는 걸까. 마리가 대꾸했다. 새로 난 잎이 같은 잎은 아니지. 작년에 난 잎들은 다 죽었고 이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잖아.” p.223. 금성녀 중에서.
유리와 마리 자매는 청결한 ‘기와집 마루에서 종아리를 대롱거리며 뻐꾸기처럼 노래를 부르고 좋은 일본제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개인 선생님을 두고 책을 읽고 펜글씨를 배우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자랐지요.’ 그 시대의 보통 여자아이들의 이름이라면 경자, 미자 정도 일 텐데, 벌써 이름부터 신식이잖아요 유리와 마리는.
부잣집 딸들로 곱게 귀하게 자랐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다 죽고 없어요. 자매가 살았던 도시도 다 바뀌었죠. 자매의 과거를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들 자신 밖에.
할머니가 된 마리와 함께 장지로 향하는 현과 완규는 함께 있는 노인의 과거 따위엔 관심도 없지요. ‘봄이 되면 나무에는 다시 새 잎이 나지요.’ 새 잎이 나기 위해서는 지난여름 무성한 그늘을 만들었던 잎들은 모두 떨어져야 해요. 과거의 영광은 모두 잊혀 진채로.
봄이 되면 다시 새 잎이 돋아나고, 그 잎들은 무성한 그늘을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 거예요. 그게 자연의 순리이겠지만 어쩐지 억울하게 느껴져요.
‘어떤 때는 시간이란 게 끊어져 있으면 좋겠어. 다음 같은 건 오지 않고 모든 게 그때그때 끝나버리는 거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 잘하면 되니까, 지금 제일 잘하려고 안달 안 해도 되잖아.’
할머니가 된 유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은희경의 소설 속 몇 문장을 읽고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이미 느끼고 있던 감정들을 확인했어요. 작가란 이래야 하는가봅니다. 내가 느낀 생각을, 그러나 몇 개의 단어를 조합해서 말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생각을, 알기 쉽게 풀어서 눈으로 읽게 하는 사람이 작가인가 봅니다.
나도 표현하기 어려운 내 생각을 알려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