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즐겨 듣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기억은 순식간에 나를 20세기로 데려다 준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어야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건 아니다. 음악 역시 기억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필사’ 또한 기억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중 하나다. 필사는 남의 작품을 내 손으로 베껴 쓰는 일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타인의 글 임에도 종이에 옮겨 적다보면 어느 순간 그 글이 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만큼 그 글에 깊게 빠지게 된다. 그리고 함박눈이 내린 새벽길에 첫 발자국을 내딛으면 발자국이 그대로 남듯 그 순간의 기억이 오롯이 새겨진다. 문득 옛 기억이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앞으로의 계획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은 날아가지 않고 필사하는 그 순간에 머무르게 되는데, 나중에 필사했던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 당시의 기분과 생각이 그대로 떠오른다. 필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기분일거라 생각한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필사를 해왔다. 책의 전체를 옮겨 적는 일을 시작한 것은 5~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책 속의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은 꾸준히 해왔다.
본격적으로 작품 전체를 필사하기 시작한 건 소설가 신경숙 때문이었다. 그녀는 작가가 되기 전에 소설가 오정희의 글을 필사하곤 했었다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나는 작품 전체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신경숙 만큼은 못 되겠지만 어쨌든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내 기준에서는 신神 같은 작가가 오정희의 글을 따라했다고 하니까, 나도 따라해야지 이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필사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특히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소설가 김영하의 경우엔 필사를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한 수순 인 듯 오정희의 글부터 시작했다. 「완구점 여인」, 「저녁의 게임」. 이 두 편의 글을 필사한 뒤 나는 ‘필사’에 중독되고 말았다. 처음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필사를 시작했지만, 두 편의 작품을 필사하고 보니 문장력이 좋아지고 거침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실력이 생길 거라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잘 읽고 싶어서’ 필사를 계속 해야겠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손으로 기억하는 필사. 글을 눈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읽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둘의 차이는 필사를 해본 사람은 분명히 알 것이다. 필사를 하는 동안에는 눈엔 보이지 않는 넓은 란 공간이 생기는 것 같다. 그 공간은 눈과 손 사이에 위치한 3차원의 공간이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다보면 그 공간에 소설의 주인공과 배경이 꽉 찬다. 그리고는 곧장 내 가슴에 포개져 흡수된다. 단어 하나하나가 내 세포 속으로 스며든다. 그것은 곧 잊힌 내 기억의 일부분을 깨우는 마중물이 된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은 필사 후 반드시 출처를 표기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먼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자기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사랑, 시를 쓰다』는 필사를 위한 책이다. 다섯 챕터로 나뉘어져 각각의 사랑시가 분류되어 있지만 필사의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피곤한 날에는 짧은 글을 필사해도 좋고, 즐거운 날에는 긴 글을 필사해도 괜찮다. 어느 시를, 어떤 글을 필사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필사 초보자에게 적합하다. 원문과 나란히 내 글씨를 남길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한 자 한 자 곱게 적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도 좋다.
필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문장력이나 사색의 힘, 두려워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힘은 천천히 온다. ‘얼어붙은 물속으로 파고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지그시 송이송이 내려앉는 눈과도 같이’. 그리고 필사는 우리의 눈과 손과 가슴과 머리에 ‘살며시 스며드는 것. 씨앗이 조용하게 싹을 틔우듯 달이 천천히 커져가듯.’ (p.70. 글로리아 밴더빌트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Love Quietly Comes) 각색) 이 책을 필사하다가 사랑시 임에도 불구하고 필사에 관한 시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각색해보았다.
필사의 매력은 무한하다. 문장력을 위해, 정신 수양을 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유보다 더 앞 선 이유 때문에 나는 필사를 권하고 싶다. 작품을 더 잘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 깊게 읽을 수 있어서, 나는 필사를 권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