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쓴 글을 잃어버리고 다시 쓰는 일은 어젯밤 먹다 남긴 콜라를 오늘 아침 다시 마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청량감이 사라진 탄산음료가 남긴 텁텁한 맛은 서둘러 양치질을 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 기분이 꼭 그렇다. 분명히 썼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쓴 글이 없다. 누가 시켜서 쓰는 독후감이 아니니까 굳이 쓰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다시 쓰지 않으면 내내 찜찜한 기분일거다. 내가 잃어버린 글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고 쓴 것이니까.. 무려 에쿠니 가오리!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쓰는 중이다. 양치질을 하듯이.
오래 전에-내가 가진 책이 2008년에 출간된 초판본이니까 아마도 2008년에-읽고 그 후에도 몇 번 틈틈이 읽었지만 기억이 희미해져 묵은 책을 꺼내 다시 읽었다. 국내에서 번역된 에쿠니 가오리의 전권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따로 모아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차가운 밤에』는 일본에서는 1989년과 1993년에 출간된 작품을 모은 단편집으로 우리나라에는 2008년에 소개되었다. ‘차가운 밤에’와 ‘따스한 접시’라는 큰 제목 아래 각각 9편과 12편, 모두 21편의 단편을 모아놓았다. ‘차가운 밤에’와 ’따스한 접시‘라는 큰 제목만 보아도 각각 소개하는 단편들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따스한 접시’는 제목에서 금세 유추해 낼 수 있듯이 음식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이다.
그 안에는 남편이나 시어머니 보다 개를 더 소중히 여기는 아내도 있고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케이크를 사달라고 말하는 성 위의 공주님들 같은 여자들도 있고, 유기농만 먹이는 엄마에게 몰래 반항하는 아이들도 있다.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일들이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다. 동화작가로 출발한 에쿠니 가오리의 순수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반면 ‘차가운 밤에’속의 이야기들에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취향이 드러난다.
그녀의 판타지다. 오래도록 기르던 강아지가 나이 들어 죽은 뒤 잠시 사람으로(그것도 남자로)환생하여 잠시 동안 주인의 곁에 머무는 이야기와 중학교 1학년 소녀가 잠시 타임슬립하여 미래를 엿보고 온 이야기, 유령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아들이 유령인 아버지를 만나고 떠나보낸 이야기 등 굉장히 기묘하다.
음식이 등장하든 유령이 등장하든 이 책 속에 소개된 단편들은 모두 매력적이고 반짝반짝 빛나서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엔 아깝다.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도 멋지지만 우린 반전의 매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끌린다. 아주 예쁜데 행동은 어지간히 털털하거나, 뚱뚱하고 게을러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깔끔하고 여성스럽거나. 반전의 매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정형화될 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꺼내는 까닭은 에쿠니 가오리의 『차가운 밤에』가 그렇다는, 반전의 매력을 가진 소설이라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불륜 이야기가 그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분명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