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시골에 다녀오다가 길가에 솟아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그 나무들이 모인 작은 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 산은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울 엄마가 어릴 적에도 있었고 울 엄마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겠지.
그러고 보면 자연이 제일 위대해. 저 산의 작은 나무가 인간보다 훨씬 위대해라고.
강운구의 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개개인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역사가 흐르고 왕이 바뀔지언정 시골 어느 한 구석의 나지막한 산비탈은 그대로일 것이다.
지난여름 내가 본 한여름의 빨간 노을 역시 천 년 전 어느 아낙도, 오천년 전 어느 아낙도 바라봤을 테다. 자연의 시간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75분의 1초만큼이나 짧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이가 들수록 짧게 느껴지는 인생이 더 짧게 느껴진다.
소설가 김훈은 강운구 작가의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운구의 셔터는 빛과 시간을 고정시키지 않고, 강운구의 파인더는 세상을 사각형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는 흘러가는 것들을 흘러가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이 영원하다. 그의 사진집 중에서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경주 남산’의 어떤 페이지들은 폐허에 내리는 빛들로 고요하다. 계림의 숲이나 신라 왕릉의 구부러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리는 빛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빛들은 고대의 빛이며 현재의 빛이다. 그의 그이 무너지고 으깨지는 세상을 슬퍼할 때도 사진 속의 빛은 그 슬픈 세상의 안쪽을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그 빛은 언제나 생멸을 거듭하는 현재의 빛이다.”
작가란 이래야 하는가보다. 내가 느낀 생각을, 그러나 몇 개의 단어를 조합해서 말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생각을, 알기 쉽게 풀어서 눈으로 읽게 하는 사람.
강운구의 사진을 보고 감동한 마음을 타인의 글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강운구는 ‘한국 작가주의 사진가 1세대이며, 30여 년 동안 세상의 모든 진실과 사물의 속뜻을 해석하는 예리한 눈으로 현신을 정확하게 기록하면서도 따뜻하고 애틋한 작품을 만들어왔다. 또한 다큐멘터리의 보편성을 주목하고 소재주의를 부정하며 대상의 내면을 찍어내는 세밀한 필치로 우리 고유의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기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향내 나게 커피 잘 뽑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녹차 잘 우려내기는 더 어렵다. 주린 배 채울 땐 아무것도 가리지 않지만 부른 배 다스릴 땐 까탈 부리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차 향내나 그 밖의 다른 향내를 밝히면서도 사람 향내는 풍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찻잎이 그렇듯이 사람도 자라면서 점점 타고난 향내를 잃어버리고 떫은맛만 낸다. 향내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사람 냄새라도 풍기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잘 먹고 잘살게 된다는 것은 마침내 사람이 향내를 풍긴다는 것이 아닐까? 녹차의 향내처럼 은은한 사람의 향내가 배부르게 먹은 몸 냄새가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어찌 모를까마는. 예전에 차 좋아했던 초의 선사나 추사 선생은 아직껏 우리에게 향내를 풍긴다. ” p. 84
사진도 글도 깊고 그윽하고 아련하다. 마음이 참 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