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최고급 스파는 어때? 뫠 사장에 누워서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고 긴긴 밤 시간에는 푹 쉬고...” (알리샤)
“난 그런 휴가는 못 참아.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윌 트레이너)
‘산을 기어오르거나 협곡에 매달리는 것’처럼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윌 트레이너.
그는 여자 친구 알리샤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자신의 집 앞에서 길을 건너다 모터바이크 사고를 당한다. 승승장구 하던 그의 삶은 그 날부터 일시 정지된다.
사고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유능한 사업가를 회사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열정적인 활동을 좋아하던 젊은이를 무기력하게. 그러나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투명인간 취급하던 그 사람들이 윌의 눈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근육 손실로 인한 전반적 통증, 소화 불량으로 인한 복통. 어깨 통증, 방광 감염으로 인한 통증 위궤양. 욕창. 두통. 열.” (p.134)에 시달리며 값비싼 호텔 같은 집에서 담당 간호사(네이선)을 두고 생활하게 된 윌. 그는 사지마비 환자가 되었다.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p.114)
그래서 윌은 자살을 기도한다.
한편 같은 도시에 사는 루이자 클라크는 방 네 개짜리 연립 주택에서 아빠, 엄마, 중풍을 앓은 할아버지와 미혼모인 여동생과 조카와 함께 산다.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루이자는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수다스럽고 활기를 더해주는 따뜻한 사람이다. 6년간 일한 카페가 문을 닫으면서 해고당한 그녀에게는 생계를 위한 또 다른 일자리가 급히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윌의 간병인으로 나서게 된 루이자. 그들의 6개월은 이렇게 시작된다.
처음부터 그 둘이 잘 맞은 건 아니었다. 윌은 루이자에게 무례하게 굴었고 루이자 또한 무례하게 대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의 태도가 오히려 서로에게 마음 문을 여는 계기가 된다. 점점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루이자는 윌을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윌은 자살 시도 후 얻은 6개월의 보장된 시간을 순조롭게 보내고 떠날 생각을 할 뿐이었다. 사실 루이자를 만나기 전 이미 자살기도를 했던 윌에게, 엄마 카밀라는 6개월간의 말미를 줄 것을 부탁한다. 그녀에게 6개월이라는 시간은 죽음을 원하는 아들의 마음을 돌릴 여지가 있는 시간이었다.
루이자와 보낸 6개월은 윌에게 사고 이후 가장 뜻 깊고 행복한 추억을 만든 시간이 되었다. 루이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은 죽음을 택한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정력을 과시하며 살다가 모든 것을 잃은 그가 루이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계속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박차고 일어날 수 없는 침대에 묶인 채 누워서 내 몸을 직접 만질 수도 씻을 수도 없이 수없이 많은 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철저히 자신과의 감정싸움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좌절과 절망은 그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로 만들었다. 사실 육체적으로 봐도 그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닌 상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정말 슬펐던 장면은 윌이 안락사를 선택하고 그 길을 떠나는 순간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슬펐던 장면은 사고가 아니었다면 윌과 루이자의 교집합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루이자가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윌과 루이자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지구가 전체집합이고 부유한 윌이 A, 가난하고 평범한 루이자는 B라고 가정하면 벤다이어그램안의 A와 B는 서로 교차하는 것이 없었다. A에 대한 B이 차집합은 오롯이 젊고 강하고 부유한 삶이었다.
알리샤를 보고 첫눈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와 권력과 반들반들한 잡지 책장 속에서 평생 살아온 냄새가 풍긴다’고 생각한 루이자는 그녀의 결혼식에서 깨닫는다. 만약 윌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윌은 알리샤와 결혼했을 것이고 자신은 그 화려한 결혼식에서 서빙 하는 역할을 했을 거라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투명인간으로 그 순간을 함께 했을 것이라고.
루이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윌은 그녀의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육신을 버리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기로 결심한다. 육체를 잃은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질을 루이자에게 주고 윌은 새 출발을 한다.
“만약 당신이 젊은 시절 파리에서 살게 되는 행운을 얻는 다면 그 후에 당신이 어느 곳에서 살든 파리는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니까.‘” 20대 젊은 시절 6년 동안 파리에서 살던 헤밍웨이가 만년이 돼서 젊은 작가에게 한 말이다. 헤밍웨이가 자살하기 전해에 쓴 『움직이는 축제』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 파리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어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추억은 제각각 다른 누군가의 추억과는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에서.)
죽기 전 루이자에게 쓴 편지에서 윌은 파리를 추억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기억 속의 파리를 직접 느끼길 원한다. 결코 끝나는 법이 없는 파리에서 루이자는 윌의 추억 위에 자신의 추억을 덧붙여나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윌은 루이자의 기억 속에 남아 그녀의 생이 다할 때까지 세상을 함께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