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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화

[도서] 빨간 장화

에쿠니 가오리 저/신유희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이런 아내가 있다.

 

치에코씨는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쪽...

사쿠짱이랑 결혼하고 나서 내 자신이 반쪽이 된 것 같아. 가끔 그런 기분이 든단 말야..

혼자 자취 생활을 할 때는 난 온전히 독립된 한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사쿠짱이랑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 난 반쪽이다. 난 반달.

사쿠짱이 없으면 완전하지가 않아. 사쿠짱이 없으면 뭔가 빠진 인생. 그렇다.

나답지가 않아. 전혀 나답지 않아. 뭐랄까, 나약한 사람 같아.”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3 중에서)

 

반면 이런 아내도 있다.

 

쇼조와 결혼 한지 10년이 된다. 하지만 히와코는 10년이라는 세월이 어쩐지 실감 나지 않는다. 신혼은 아니지만 안정된 부부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둥둥 떠 있다. 의지할 곳 없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 아이가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빨간 장화 중에서)

 

마스다 미리가 쓴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의 주인공 치에코는 결혼 한지 10년이 넘은 주부로 직장에서 비서로 일한다. 아이는 없다. (마스다 미리는 실제로는 미혼)

에쿠니 가오리가 쓴 빨간장화의 주인공 히와코 역시 결혼 한지 10년이 넘은 주부다. 아이는 없고, 원예점에서 일주일에 서 너 번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다.)

 

이 두 작품에 등장하는 비슷한 조건의 두 부부의 차이는 극명하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결혼 한지 10년 된 나는 어느 쪽인지 저울질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둘 다 아니다. 결혼생활의 정점은 출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신혼처럼 마냥 달콤하고 따뜻하고 기분 좋게 사는 치에코씨네도, 무미건조함의 극치를 달리는 히와코씨네도 정점 없이 평온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쪽은 치에코씨댁. 하지만 히와코씨의 마음중 일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2005년작 빨간 장화는 결혼 한지 10년이 넘은 쇼조와 히와코의 결혼생활을 담담히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남편의 시선으로, 때론 부인의 시선으로 연결된다.

출판사 서평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두고 무섭다고 표현 한다고 했다. ‘소리를 내지를 만한 무서움이 아니라 오싹하고, 절실하게, 미지의 것들과 잘 알고 있지만 눈치 채지 못했던(혹은 눈치 채지 않으려 했던)것들을 들춰내어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잘 못 느꼈는데 빨간 장화만큼은 꼭 그렇다. ‘잘 알고 있지만 눈치 채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들춰내어 정곡을 찌른다’. 그렇기 때문에 미혼인 남녀 여러분은 가급적 이 책을 읽지 마시길..! 미혼 남녀에게 이 책은 오싹오싹 공포체험과 같다. 초등학생에게 유독 인기 많은, 검은 표지에 유령 따위를 그려 넣은 바로 그 오싹오싹 공포체험말이다. 어른들이 읽으면 그다지 재미도 없고 무섭지도 않은 그 책을, 초등생들은 무섭다고 호들갑떨며 읽는다.

그리고선 무서워서 밤에 화장실도 못가는. 하지만 어른들은 알고 있다. 그 책은 그저 분위기 장난, 말장난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걸.

그러므로 미혼 남녀들이여! 빨간 장화를 읽고 부디 겁먹지 마소서! 결혼 생활은 이게 다가 아니라오.

 

결혼 한지 10년이 넘은 쇼조와 히와코. 쇼조는 중견 식품회사의 부장으로 회사에서는 애처가로 소문났다. (단지 술자리를 싫어해서 모임을 피하고 곧장 귀가할 뿐인데) 그러나 실상은 자기 손으로 점심도 차려먹지 못하는 한심한 남자이다. 뿐만 아니라 십대 소년처럼 양복을 제멋대로 벗어놓고 샤워 후에는 젖은 수건을 이불 위에 아무렇지 않게 올려놓는다. 히와코가 집을 미울 때마다 심통을 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또 아니다. 그는 아내의 말에 거의 매번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TV를 본다거나, 신문을 읽는다거나.

 

히와코는 전업주부였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간이 남아돌자 파트타임으로 근처 꽃집에서 일주일에 나흘 정도 일한다. 남편이 출근하면 일하러 가는 날을 제외하고는 깔끔하게 집 안을 정리 하고 집에 혼자 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전신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쇼짱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남편을 향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남편이 건성으로 듣는 걸 거의 매번 알아차린다. 그래서 히와코는 남편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함께 있는데도 마치 없는 것 같이 느낀다는 것을, 쇼조와 함께 있으면 외롭다는 것을알고 있다.

 

심지어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도 남편은 컴퓨터를 가지고 놀다가 TV를 보고, 부인은 남편이 TV를 보기를 기다리다가 혼자 산책을 나간다. 건조한 이들 부부의 생활은 그 뿐만이 아니다. 남편은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빨간 장화 모양 용기 안에 초콜릿이니 시판 과자가 잡다하게 들어있는 시즌 상품을 사온다. 부인이 그만 사오라고 몇 번이나 요구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이 둘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도저히 이 둘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럴 거면 왜 함께 사는지, 차라리 드라마처럼 각자 바람이라도 펴서 자신들과 맞는 사람을 만나 새 출발하는 편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둘이 도대체 어떻게 결혼했나 싶다. 이들의 연애는 어땠을까?

 

불협화음, 그것은 단조로운 화음과 견주어 얼마나 매력적인가” (본문 중에서)

 

히와코는 생각한다. 불협화음은 단조로운 화음과 견주어 보면 매력적이라고.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불협화음을 들어야 하는 독자는 귀가 뜯어질 듯 아프고 머리가 욱신거린다. 그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히와코의 안간힘으로 느껴졌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길러야 비로소 어른의 단계에 진입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고 기르지 않은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온전한 어른이 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이것은 직업적인 성공이나 돈을 잘 버는 사실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간은 이를테면 숙성의 시간이다. 아이였던 한 사람이 어른이 되기 위해 갖아야 하는. 미혼이거나 기혼이어도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반발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혼이라는 방법으로 중도 탈락하는 사람도 있다.) 단 수도자는 예외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인고의 시간을 겪으니까.

아이를 낳고 기르다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종종 경험할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를테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금요일 밤의 파티나 나만의 시간 같은. 똑똑한 줄 알았던 아이가 알고 보니 둔재인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감과 그로인한 겸손함.

사람은 인간을 키우면서 진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쇼조와 히와코는 서로 불협화음을 내는 존재들이다. 십대 소년 같은 행동을 하는 쇼조와 정신적인 자립을 못한 히와코, 둘 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처럼 행동한다. 게다가 자녀도 없으니, 그들은 몸만 커진 아이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소설 속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삐그덕 빼그덕 할지언정,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지언정, 그들은 함께 살아간다.

에쿠니 가오리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사실은 어쩌면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부란 서로 맞지 않아도, 불협화음을 낼지라도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관계라는 것.

결혼까지 결심했을 때의 자기 자신을 믿고, 나를 선택한 상대를 믿고 함께 살아야 하는 관계라는 것.

다만,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는 에쿠니 가오리 자신의 생활을 이 책에 녹여낸 것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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