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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요리

[도서] 오늘의 요리

하시모토 쓰무구 저/ 권남희 역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달의 사막을 사박사박이라는 맑은 소설이 있다. 열 살 여자아이 사키와 작가인 엄마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동화 같은 소설이다. 섬세하고 잔잔해서 참 예쁘고 정감 있는 작품이었는데, 소설을 읽고 가장 놀랐던 건 기타무라 가오루라는 이름의 저자가 다름 아닌 남자였다는 점이었다. 그 때처럼 놀랐다. 오늘의 요리를 읽고나서. 저자인 하시모토 쓰무구! 남자다.

 

요리라는 단어 때문에 이 작품의 작가가 여자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요즘엔 남자 셰프도 흔하니까. 이 소설을 여성 작가가 썼다고 제멋대로 생각했던 이유는 요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평범하고 잔잔한 이야기들 때문이다. ‘달의 사막을 사박사박과 같이 섬세하고 맑고 포근한 느낌의 소설이어서 남자의 감성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학생시절부터 살던 맨션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구오다 사오리. 옆 집 청년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학생시절부터 살고 있지만 서로 가까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다. 우연히 연말 대청소를 하다가 옆 집 청년의 도움을 받게 된 사오리, 뒤늦게 온 그녀의 친구는 옆 집 청년이 놓고 간 아세톤을 가져다주라고 한다. 맛술과 설탕과 한펜을 넣어 만든 생선살 달걀말이를 들고.

(생선살 달걀말이)

 

도쿄에서 정착하게 된 슈헤이. 아들이 고향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시골의 부모님은 그런 아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슈헤이는 부인과 함께 고향집 근처를 둘러보며 추억거리를 이야기한다. 혼자 일찍 일어난 슈헤이는 가족을 위해 이세식 떡국을 만들고, 변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건 어머니의 레시피로 만든 이세식 떡국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세식 떡국)

 

모두가 헤어지라고 조언한 사람과 결국 헤어지고 만 치즈루. 늦게 퇴근 한 남동생에게 스파게티를 만들어준다. 웃는 얼굴이 자상했지만, 결국엔 배신당한 그 남자에게 배운 스파게티를.

스파게티를 만들며 동생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함께 스파게티를 먹는데 문득 남동생이 말한다. 그 사람과 헤어지길 잘했다고. 헤어져야 마땅한 남자가 알려준 레시피로 맛있게 요리를 해 먹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치즈루는 동생도 자신도 의외로 어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얼렁뚱땅 까르보나라)

 

거래처 영업부 사원인 아츠시와 사귀게 된 카요. 둘은 카요의 집에서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카요는 느긋한 다음날을 원했지만 아츠시는 느닷없이 미토행을 원한다. 매화를 보고 아구탕을 먹자며. 그러나 급하게 찾아간 미토에는 매화도 피어 있지 않았고, 유명하다는 아구탕집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카요는 아츠시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지만 둘이 장을 봐서 집에서 함께 아구탕을 만들어 먹은 뒤에는 오히려 행복함을 느낀다. (아구탕)

 

특별한 수입 없이 글을 쓰는 카즈토시. ‘카즈토시는 애매한 상태다. 불안과 희망은 항상 싸우고 어느 쪽도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양손은 늘 비어 있다.’는 문장만으로도 그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 떠오르는 건 부인을 사랑하는 카즈토시의 다정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실제 작가의 실생활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한다. (벚꽃놀이 도시락)

 

각각의 단편들 맨 첫 장에는 제목과 함께 요리의 이름과 레시피가 함께 적혀있다. 이 음식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두근두근 기대하며 읽는 재미도 물론 좋았지만, 손바닥만 한 소설을 차례로 읽는 동안 23편의 영화를 본 듯도 하고, 23개의 방에 차례로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느낌도 있어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밀도가 높은 소설들이어서 마음 놓고 소설에 푹 빠질 수 있었다고나 할까.

 

책의 뒷 표지에는 괴로운 일이 있어도 우선 먹자. 내일도, 모레도 두렵지 않다. 이 순간만 있다면.” 가훈으로까지 삼고 싶은 이 훌륭한 문장이 끝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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