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면 몰라도 소설에 관한 한 인류 종말을 그린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 눈길이 끌린 건 2년 전 인상 깊게 읽은 ‘유랑의 달’의 작가 나기라 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이란 딱지가 붙은 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구원을 주고받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유랑의 달’은 장르물을 과하게 편식하면서도 사쿠라기 시노를 최애작가로 꼽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는 작품이었고, 그래서 나기라 유의 후속작 소식을 내내 고대해왔습니다.
샹그릴라는 잘 알려진 대로 ‘지상에 있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생명체를 전멸시킬 소혹성과의 충돌 전 한 달의 시간을 그린 작품의 제목이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라는 점은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이런 제목이 붙은 이유는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얻지 못했던 평안과 행복을 (지구의 멸망을 앞두고) 찾은 사람들”(옮긴이의 말 中),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야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깨닫는 사람들, 또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미처 사랑을 줄 수 없었던 사람과 마지막을 함께 보내며 켜켜이 쌓아두었던 속내를 내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열흘밖에 없어. 슬프고, 무섭고, 최악이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괜찮게 변한 것 같아. 세상이 그대로였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마음은 모른 채로 죽었겠지.”(p276)
“내일 죽을 수 있다면 편해질 거라 꿈꾸었다. 그렇게 바랐던 내일이 마침내 찾아왔다. 그런데 이제야 조금 더 살아봐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p393)
네 편의 연작단편의 주인공들은 행복이나 기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인물들입니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17세 소년 유키는 끔찍한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고,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 야쿠자의 똘마니를 전전하며 40세에 이른 메지카라 신지는 거절할 수 없는 살인청부 때문에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불량소녀 출신인 중년의 시즈카는 지구 멸망을 코앞에 두고 18년 만에 만난 연인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한편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29세의 가희(歌姬) Loco는 경쟁자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채 극단적인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구의 멸망은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말을 다룬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도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의 참상이 그려집니다. 자살과 살인이 일상화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패닉에 빠진 채 강도와 강간을 일삼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영웅이 등장할 가능성도, 세계의 경찰 미국이 알아서 소혹성을 파괴해줄 가능성도 전무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비관과 공포만 남은 한 달의 카운트다운 와중에 뒤늦게 소중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찾아내는, 그래서 “누구나 죽을 때는 혼자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누구와 함께 있을지는 중요한 문제다.”(p222)를 깨닫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희망 없는 미래에 절망하며 차라리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랐던 인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소혹성 충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재난 덕분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짧지만 소중한 행복과 웃음, 즉 샹그릴라를 되찾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종말에 대처하는 계몽서 혹은 힐링 에세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 직전의 공포와 절망은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하고, 주인공들이 행복과 웃음을 되찾는 과정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이며, 겨우 손에 넣은 그 순간은 고작 찰나의 순간에 불과해서 독자 입장에선 허황된 종말 액션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리얼리티와 긴장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몇 페이지를 앞두곤 뜬금없는 영웅이 나타나도 좋으니 지구를 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했습니다.
전작인 ‘유랑의 달’에서도 느낀 바지만 나기라 유의 문장은 제가 좋아하는 사쿠라기 시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애틋함과 처연함, 따뜻함과 담담함을 머금은 문장들이 지구 멸망이라는 특별한 소재와 잘 어우러져서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다음엔 어떤 이야기로 그녀를 만나게 될지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아직은 다소 낯선 작가인 나기라 유의 진가가 한국 독자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