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작가와의 인연은 3년 전 이 때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는 미 제33대 트루먼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룬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을 펴낸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판사로 있던 트루먼은 1934년 상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1944년 4선에 도전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1945년 루즈벨트가 4선 취임 82일 만에 급서하자 트루먼은 제3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연임에 성공, 1953년까지 직을 수행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간 잘 알지 못했던 트루먼 대통령의 새로운 면모를 여실히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저자는 한국일보사에서 24년간 사회부와 경제부 기자로 일하면서 글쓰기를 배웠다. 현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이투데이의 칼럼 '정숭호의 키워드'를 쓰는 등 집필 활동도 왕성하다.
이번에 신작 '가보지 않은 여행기'를 들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여행기 대상은 고전과 현대 문학 17편의 작품에서 배경으로 삼았거나, 아니면 작가가 살면서 작품을 썼던 곳들이다.
"『가보지 않은 여행기』에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칼럼을 쓰기 위해, 내 영혼이 더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어온 책들에서 찾아낸, 꼭 가보고 싶은 곳들에 대한 제 나름의 소개가 들어있습니다. 작중 인물이 살던 곳도 있고, 작중 중요 사건이 벌어진 곳도 있습니다. 또 작가가 작품의 영감을 얻은 곳,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작품을 위대하게 마무리한 곳도 있습니다." - 책머리에서
흔히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은 물리적 법칙에 들어맞기 보다 거의 소설이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한다. 우리가 소설을 찾는 것도 경험하지 못한, 가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때 소설의 문장은 남다른 감상이나 해석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를 띠고 상상력을 한껏 북돋우기 마련이다. 만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안내자 역할을 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작품을 풍요롭게 감상할 수 있으리라. 이 책이 바로 문학 박물관을 찾은 독자를 안내하는 도슨트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 메인 주에 있는 마운트 데저트 섬은 그림 같은 풍경으로 유명하다. 벨기애 태생의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곳에서 40년 가까이 살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이라는 명작을 썼다.
책은 여행지에 대한 지리적 소개와 함께 문호들의 작품에 대한 개요와 저자의 감상을 알뜰히 담았다. 가령 괴테('이탈리아 여행', 이탈리아 베니스의 주데카 섬)와 위고('웃는 남자', 영국령 채널군도의 건지 섬) 그리고 톨스토이('전쟁과 평화', 체코 아우스터리츠와 러시아 보론디노) 등 대문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약 스무 곳의 장소가 총 15장으로 구성됐다.
내게 낯선 작가도 몇 명 등장해서 한껏 호기심을 부추긴다. 가령 제이콥 브르노우스키('인간 등정의 발자취', 이란 자그로스의 바주프트 강),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미국 메인 주의 마운트 데저트), 미하일 레르몬토프('우리 시대의 영웅', 캅카스 산맥), 할도넬 락스네스('빙하 아래', 아이슬란드의 스내펠스 화산)가 그렇다.
오르한 파묵(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이 케말과 퓌순 그리고 시벨의 삼각 관계를 그린 『순수박물관』을 집필한 이스탄불의 아나돌루히사르에 있는 오래된 해안 저택은 어느 여름 한철 내가 파묵의 작품을 읽으며 느긋하게 보내고 싶은 곳이다.
아, 그러고보니 한때 터키가 지배했던 크레타 섬에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있구나. 크레타는 1821년부터 독립 전쟁을 시작해 1898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카잔자키스가 열다섯이었을 때였다. 그는 독립을 위해 싸웠던 아버지에게서 자유와 조국의 소중함을 배웠다. 카잔자키스는 자신이 죽기 2년 전에 쓰기 시작해 사후 8년 뒤에 출간된 『영혼의 자서전』에서 크레타 사람들의 희생을 고스란히 담았다.
잘롱고의 절벽. 꼭대기에 잘롱고의 비극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이 보인다. 여인들이 손을 잡고 운무를 추는 형상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잘롱고 절벽의 비극이었다. 잘롱고는 아테네 북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다. 터키 군대가 쳐들어와 마을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미처 대피하지 못한 57명의 여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비장한 죽음을 택했다. 여인들은 둥글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다 한 명씩 안고 있던 아기를 절벽 아래로 던지고 자신들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카잔자키스는 이 비극을 『영혼의 자서전』에 명시해 놓았다. 진정 그는 그리스인이요, 그리스 정신이었구나.
반가운 곳, 영국령 건지 섬 이야기도 있다. 내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통해 익히 들었던 곳이지만, 위고의 주 활동무대이기도 했다니 새삼스럽기 그지없었다. 위고는 나폴레옹 3세와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정치적 위기를 느껴 벨기에를 거쳐 1855년 건지로 망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15년 넘게 살면서 『레 미제라블』, 『바다의 일꾼』, 『웃는 남자』, 『93년』 같은 소설과 시집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위고가 살았던 4층짜리 오트빌하우스는 증손녀가 파리시에 기증,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약 10년 전 가족과 함께 2년 간 영국에서 공부를 했었다. 당시 셰익스피어, 브론테 남매, 워즈워드 시인,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와 토마스 하디 등 문호의 고향을 찾아 부지런히 다녔건만(아래 우리가 다녔던 두어 군데 소개해 드린다), 건지 섬에 깃든 내력은 미처 알지 못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언제 기회되면 건지를 찾아 돼지 바베큐를 먹은 다음, 오트빌하우스를 둘러보고 커피 타임을 갖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생가(Stratford-upon-Avon, 왼쪽)와 워즈워드가 살았던 도브 코티지(Grasmere)
『빙하 아래』를 쓴 아이슬란드의 할도르 락스네스(1955년 노벨문학상 수상)도 어떻게 보면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과연 무슨 이유에서일까? 수전 손택에 따르면 베른은 『지구 속 여행』에서 아이슬란드의 스내펠스 화산을 무대로 삼으면서 프랑스가 아이슬란드의 한 지역을 식민화한 것에 대한 조롱 투의 인식을 펼쳤다.
이에 아이슬란드의 국민 작가 락스네스가 가만 있을 손가. 그가 1968년에 발표한 『빙하 아래』는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관한 종교 소설이었다. 뭐랄까, 베른과는 달리 좀 근엄하게 접근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나저나 락스네스 작품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어 그간 접하지 못했는데, 저자를 통해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책을 내려놓으며 '가보지 않은 여행기'를 언젠가 '가본 여행기'로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내 마음 속의 소설을 따라 문호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또다른 나를 찾는 여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