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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甲午年; 서기 전 27)

신라 시조 31, 고구려 시조 11, 한나라 성제 하평 2

 

겨울 11 고구려가 부위염(扶尉○)을 보내어 북옥저(北沃沮)를 멸하였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 하는데, 그 지역이 북쪽으로 읍루(○)와 연접해 있다. 읍루는 불함산(不咸山) 북동쪽 큰 바닷가에 있는데, 그 지역은 험준한 산악이 많고, 사람들은 용맹스러운 힘이 많으며, 토질이 차가워 겨울에는 항상 굴속에 거처하였다. 그들의 활은 길이가 4척인데 위력이 노()와 같고, 화살은 호시(○)를 사용하는데 길이가 8촌이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하였는데,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나라이다. 한나라 때 이후로 부여(扶餘)에 신하로 귀속되자 그에게 조부(租賦)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풍속은 배 타기를 좋아하고 노략질을 잘하므로, 옥저에서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매양 여름철에는 바위 굴속에 숨어 있다가 겨울철에 뱃길을 통행할 수 없게 되어서야 곧 내려와 살았는데, 이때에 와서 멸하게 되었다.

 

정유년(丁酉年; 서기 전 24)

신라 시조 34, 고구려 시조 14, 한나라 성제 양삭(陽朔) 원년

 

가을 8 고구려의 왕모(王母) 유화(柳花)가 동부여(東扶餘)에서 졸()하였다. 부여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워 주었다.

겨울 10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사례(謝禮)하였다.

 

신축년(辛丑年; 서기 전 20)

신라 시조 38, 고구려 시조 18, 한나라 성제 홍가(鴻嘉) 원년

 

2 신라가 호공(瓠公)을 보내어 마한(馬韓)에 빙문(聘問)하였는데, 마한왕이 꾸짖기를,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두 나라가 우리의 속국이 되었는데도 근년에는 직공을 보내지 않으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같아서야 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두 성인이 처음 일어나게 됨으로부터 인사(人事)가 닦아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 창고가 가득 차고 인민(人民)이 겸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한·변한·낙랑·왜인(倭人)이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도, 우리 임금께서 겸허하게 하신(下臣)을 보내어 빙례(聘禮)를 닦으니, 이는 예()에 지나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도리어 성을 내며 군사로 위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마한왕이 더욱 화를 내어 죽이려고 하다가, 좌우에서 간하므로 멈추고 곧 돌아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마한에 온 자가 자못 많았는데, 진한과 섞이어 살게 되자 이에 이르러 점점 번성해졌으므로 마한이 이를 시기하였다. 호공(瓠公)은 본래 왜인인데, 처음에 박[]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호칭하였던 것이다.

 

임인년(壬寅年; 서기 전 19)

신라 시조 39, 고구려 시조 19, 유리왕(琉璃王) 원년,

한나라 성제 홍가 2

 

 

마한왕(馬韓王)이 졸()하였다. 어떤 사람이 신라왕에게 말하기를,

서한왕(西韓王)이 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하였으니, 지금 그들이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때에 친다면 그 나라는 족히 평정시킬 것도 없습니다.”

하자, 왕이 말하기를,

남의 재앙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위하였다.

 

[신 등은 살펴보건대,]

옛날에 군사(軍師)가 되어 상중(喪中)에는 치지 않았으니, 상중인데도 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어서입니다. 옛날에 등나라 소공(昭公)이 졸한 지 3개월 만에 송()나라가 등나라를 에워싼 것을 춘추(春秋)에서 폄론(貶論)하여 사람들에게 일컬어져 있고, ()나라 사개(士○)는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침범하여 곡()에 이르렀다가 제후(齊侯)가 졸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곧 돌아갔는데, 춘추에 갖추어 써서 그를 포장(褒○)하였습니다. 지금 (신라의) 시조가 전일의 분함을 버리고 이웃 나라의 근심을 불쌍하게 여겨, 오직 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으니, 이른바 원망하면서도 의리를 버리지 않고 노()하면서도 예를 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그 마음씀이 너그럽고도 인자하다하겠습니다. 대저 창업한 군주의 일은 자손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이니, 후손들이 충후(忠厚)한 것으로 서로 전하여 천백 년을 오래도록 유지하게 된 것은 어찌 오늘날 자손에게 계책을 끼친 것의 착함이 아니겠습니까?”

 

여름 4 고구려왕이 아들 유리(類利)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임신하게 되었는데, 왕이 이미 다른 곳으로 간 뒤에 곧 유리를 낳았다. 그런데 뛰어난 지조가 있고 탄환 쏘기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나가 놀며 참새를 쏘다가 잘못하여 물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맞혔다. 여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어 그 완악함이 이와 같다.”

하니, 유리가 부끄러워하며 다시 진흙 탄환을 쏘아 그것을 막아 주었다. 돌아와서 그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어머니가 농담으로 이르기를,

너는 정해진 아버지가 없다.”

고 하였다.

 

유리가 울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정해진 아버지가 없으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자결하려고 하니, 어머니가 그를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한 이야기는 농담이다.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므로 남쪽 지방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웠다.”

하니, 유리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필부(匹夫)가 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머지가 떠날 때에 나에게 이르기를, ‘유물(遺物)을 칠령(七嶺) 칠곡(漆谷)의 돌 위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가지고 오는 자라야만 나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유리가 산골짜기로 가서 두루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하루는 집 기둥의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함을 듣고 나아가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七陵]로 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 풀이하기를,

칠령 칠곡이라 함은 일곱 모를 이름이요, 돌 위 소나무는 기둥이다.”

라 하고, 곧 기둥 밑을 수색하였는데, 끊어진 칼 한 토막을 얻었다.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3인과 더불어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러서 왕을 뵙고 칼을 바치매, 왕이 보관하였던 끊어진 칼을 내어서 그와 맞추어 보니 과연 징험이 되었으므로, 이에 기뻐하여 세워서 후사로 삼았다.

가을 9 고구려왕 주몽이 훙()하자, 태자 유리(類利)가 즉위하였다. 시조를 용산(龍山)에 장사지냈으며, ()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

 

동국통감 1

고전국역편집위원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청목)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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