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癸卯年; 서기 전 18)
신라 시조 40년,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2년,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원년
한나라 성제 홍가 3년
○ 봄 백제 시조 고온조(高溫祚)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처음에 주몽이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그곳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 셋만 있었는데, 주몽을 비상한 사람으로 보고 둘째 딸로써 그 아내를 삼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왕이 훙(薨)하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長子)는 비류(沸流)라 하고, 차자(次子)는 온조(溫祚)라 하였다.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자 두 사람은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게 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인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 한산(漢山)에 이르게 되었는데,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해빈(海濱)으로 가서 살려고 하므로, 10신(臣)이 간하기를,
“생각하건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는 고악(高岳)을 점거하며, 남쪽으로는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은 대해(大海)로 가로막혔으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신으로써 보좌를 삼으며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가 없었는데, 위례는 도읍이 이미 정해져 백성들이 태평하게 지내는 것을 와서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분하게 여기다 죽으니, 그 신민(臣民)들이 모두 위례에 돌아오므로, 국호를 고쳐 백제(百濟)라고 하였다.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한가지나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
[신 등은 살펴보건대,]
“고구려와 백제는 나라를 세운 것이 모두 혁거세의 뒤였는데도, 혁거세는 오히려 왕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 주몽은 금와(金蛙)의 여러 아들에게 시기함을 당하자, 난을 피하여 도망해 숨었다가 험한 길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졸본천(卒本川)에 와서 살았으며, 온조는 종국(宗國)에 용납됨을 보지 못하게 되자, 방랑하며 다니다가 위례성에 와서 살았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운 초창기에 겨우 스스로 보존할 수 있었는데도 왕으로 칭하였으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三國史)》를 지을 때에 혁거세 본기(赫居世本紀)에서는 거서간(居西干)으로 칭하면서 주몽이나 온조에는 모두 왕으로 칭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이며, 심지어 해부루(解夫婁)의 부여에 있어서와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에 있어서나, 마한·황룡(黃龍) 등 나라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사소한 일로 쓸데없이 다투기만 하고 있었으니, 어찌 나라꼴이 되었겠으며, 어찌 왕이라 칭하였겠습니까? 그런데 김부식은 모두 왕으로 칭하였으니, 또한 다시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삼한(三韓)이 솥발과 같이 나누어 있을 때에 마한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변한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여 구구한 동한(東韓)의 땅으로 바둑판처럼 흩어져 있었는데, 남은 80국을 어찌 다 왕으로 칭하였겠습니까? 가만히 김부식이 국사(國史)를 수찬한 규례를 보건대, 신라의 임금에 대해서는 대(代)마다 각각 호칭을 달리하면서 구사(舊史) 그대로 썼으며, 다른 나라에는 본래 다른 칭호가 없으니, 주(主)라 쓰는 것은 옳지 않고, 왕(王)이라 쓰는 것도 옳지 않으며, 또 이적(夷狄)이라 하여 명호(名號)를 없이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역사를 씀에 있어 그 설명을 얻지 못하여 이에 쓰기를 ‘왕’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한 것을 알겠습니까? 김부식이 신라 본기에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을 모두 사실대로 써 놓았고, 임금을 열거하여 반드시 쓸 데에 이르러서는 당연히 본호(本號)를 따랐어야 할 것인데도 매양 왕으로 써 놓았으므로 그 사실과는 같지 않으니, 이 또한 사기를 수찬하며 문법을 세우는 데에 부득이하여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여름 5월 백제가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가을 7월 고구려왕이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다.
[권근이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옛날 노(魯)나라 문공(文公)은 3년 뒤에 장가갔으되, 《춘추(春秋)》에 오히려 그가 상사(喪事)를 끝내지 않고 혼사(婚事)를 도모한 것을 비평하였는데, 더구나 기년(期年) 안에 비(妃)를 맞아들일 수 있겠는가? 유리(類利)의 죄는 폄절(貶絶)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명(自明)한 것이다.”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서기 전 17)
신라 시조 41년, 고구려 유리왕 3년, 백제 시조 2년
한나라 성제 홍가 4년
○봄 정월 백제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말갈(靺鞨)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되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기(兵器)를 수선하고 곡식을 쌓아 막고 지키는 계획을 해야 한다.”
하였다.
○봄 3월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었으므로, 우보(右輔)를 삼고 병사(兵事)에 관한 일을 위임하였다. 말갈은 옛날 숙신씨(肅愼氏)였다. 나라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는데, 북옥저(北沃沮)와 서로 연접하였다.
[신 등은 살펴보건대,]
“말갈의 지역이 가장 북쪽에 있는데, 고구려기(高句麗紀)에 이르기를, ‘졸본의 지역이 말갈과 연접하였으나 신라와 백제가 항상 말갈에 대한 근심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말갈이 고구려를 넘어와 두 나라를 침범하겠습니까? 그리고 백제기(百濟紀)에는 이르기를, ‘국가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는데, 그가 망하게 되자 땅은 신라·발해·말갈로 나누어지게 되었다.’하였으며, 신라기(新羅紀)에 역시 이르기를, ‘말갈은 지역이 아슬라주(阿瑟羅州)와 연접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알 수 없지만 별도로 한 종족이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의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뱃길로 바다를 건너와 두 나라를 침범하였던 것입니까?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겨울 10월 고구려 왕비 송씨(松氏)가 훙(薨)하였다. 왕이 다시 두 희(姬)에게 장가들었는데,
화희(禾姬)는 골천인(○川人)이고 치희(雉姬)는 한인(漢人)이었다. 두 희가 총애를 받으려고 다투므로, 왕이 동서(東西)에 두 궁을 짓고 그들을 있게 하였는데, 뒤에 왕이 사냥 나가서 7일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두 여인이 서로 질투하다가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한가(漢家)의 비녀(婢女)가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
하니, 치희가 부끄러워 한탄하며 도망하여 돌아갔는데, 왕이 친히 그를 뒤따라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을사년(乙巳年; 서기 전 16)
신라 시조 42년, 고구려 유리왕 4년, 백제 시조 3년
한나라 성제 영시(永始) 원년
○가을 9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경첩(輕捷)한 군사를 인솔하고 급히 쳐 크게 파하였는데, 적의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두 명뿐이었다.
병오년(丙午年; 서기 전 15)
신라 시조 43년, 고구려 유리왕 5년, 백제 시조 4년
한나라 성제 영시 2년
○가을 8월 백제가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였다.
경술년(庚戌年; 서기 전 11)
신라 시조 47년, 고구려 유리왕 9년, 백제 시조 8년
한나라 성제 원연(元延) 2년
○봄 2월 말갈이 백제의 위례성을 포위하므로,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는데, 열흘이 지나자 적들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가게 되었다. 왕이 정예한 군사를 뽑아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 이르러 싸워서 그를 이겼다.
○가을 7월 백제가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을 세우니, 낙랑 태수(樂浪太守)가 사람을 시켜 고하기를,
“지난번 빙문(聘問)하고 우호(友好)를 맺었으므로 의리로 보아 한집안과 같이 지내야 할 것인데, 이제 우리 국경에 다가와 성책(城○)을 만들어 세우니, 혹자는 ‘그가 잠식(蠶食)할 계책이 있는 것인가?’ 한다. 만일 옛 우호 관계를 어기지 말고 성책을 헐어 없앤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번 싸워 승부로 결판내기를 청한다.”
하였다. 백제왕이 말하기를,
“험고(險固)함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常道)인데, 어찌 감히 이러한 것으로써 우호를 변하겠는가? 만약 집사(執事)가 강대함을 믿고서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소국(小國)에서도 그에 대처할 것이다.”
하였는데, 드디어 낙랑과 화친을 잃게 되었다.
임자년(任子年; 서기 전 9)
신라 시조 49년, 고구려 유리왕 11년, 백제 시조 10년
한나라 성제 원연 4년
○ 여름 4월 고구려왕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선비(鮮卑)가 험고함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고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우리나라의 걱정이 된다. 능히 제어하는 자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
하니, 부분노(扶芬奴)가 말하기를,
“선비는 험고한 나라에다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어리석어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려우나 꾀로써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마땅히 사람을 시켜 이간하되 나라가 적고 군사가 약하다는 것으로써 속이게 되면, 선비가 우리를 업신여겨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가거든, 왕께서는 약한 군사로 하여금 성 남쪽으로 거짓 패배해 달아나게 하면 저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추격할 것입니다. 신은 정예 군사를 인솔하여 그 성으로 들어가고 왕께서는 친히 용맹스런 기마병을 거느리고 협격(挾擊)하면 이길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선비가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하여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는 놀라서 달아났다. 부분노는 관문(關門)에서 막아 싸워 참살(斬殺)한 것이 매우 많았고, 왕은 기(旗)를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왔다. 선비는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달려서 항복하여 드디어 속국(屬國)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에게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는 왕의 덕입니다. 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하고 받지 않았다. 왕은 곧 황금(黃金) 30근(斤)과 양마(良馬) 10필(匹)을 하사하였다.
○겨울 10월 말갈(靺鞨)이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 2백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서 스스로 보존하고 있었다. 왕은 친히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가서 그를 구하니, 적이 물러갔다.
계축년(癸丑年; 서기 전 8)
신라 시조 50년, 고구려 유리왕 12년, 백제 시조 11년
한나라 성제 유화(綏和) 원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에게 백제의 병산책(甁山○)을 습격하여 격파하게 하여 1백여 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가을 7월 백제가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길을 막았다.
을묘년(乙卯年; 서기 전 6)
신라 시조 52년, 고구려 유리왕 14년, 백제 시조 13년
한나라 애제(哀帝) 건평(建平) 원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빙문(聘問하고 서로 아들을 볼모로 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함을 꺼리어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은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니, 대소가 그에 대해 성을 내었다.
○2월 백제의 왕도(王都)에 늙은 노파가 변하여 남자가 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왕성(王城)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여름 5월 백제의 왕모(王母)가 훙(薨)하였다. 왕이 뭇 신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국가는 동쪽으로 낙랑이 있고 북쪽으로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더구나 지금은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세상을 떠났으니, 형세가 스스로 편하지 못하다. 내가 보기에는 한수(漢水)의 남쪽은 토양이 비옥하니, 거기에 도읍을 옮겨서 영구히 편안함을 도모하려 한다.”
하였다.
○가을 7월 한산(漢山)의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를 옮겨서 채울 것을 명하였다.
○8월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한 것을 고하였다. 그리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닿았다.
○9월 곧 성궐(城闕)을 세웠다.
○겨울 10월 부여왕이 군사 5만으로써 고구려를 침노하였는데, 마침 큰 눈이 와서 사졸(士卒)이 많이 얼어 죽게 되자 곧 이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