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년(丙辰年; 서기 전 5)
신라 시조 53년, 고구려 유리왕 15년, 백제 시조 14년
한나라 애제 건평 2년
○봄 정월 백제가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봄 2월 왕이 부락(部落)을 순무(巡撫)하면서 농사를 권장하였다.
○가을 7월 백제가 한강(漢江) 서북(西北)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놓았다.
동옥저(東沃沮)가 사신을 신라(新羅)에 보내어 양마(良馬) 20필을 바치며 이르기를,
“과군(寡君)이 남한(南韓)에 성인(聖人)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산(蓋馬山)의 동쪽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의 물가에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읍루(○婁)·부여(扶餘)와 남쪽으로는 예맥(濊貊)과 서로 접하였는데,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의 길이는 1천 리나 된다. 읍락(邑落)에는 각각 수장(帥長)을 두었다. 토지는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여 있어 오곡(五穀)에 적합한데, 밭농사가 잘된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맹스러운데,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하여 그 곳을 현도군(玄○郡)으로 삼았다.
정사년(丁巳年; 서기 전 4)
신라 시조 54년, 고구려 유리왕 16년, 백제 시조 15년
한나라 애제 건평 3년
○봄 정월 백제가 새 궁실(宮室)을 지었다.
기미년(己未年; 서기 전 2)
신라 시조 56년, 고구려 유리왕 18년, 백제 시조 17년
한나라 애제 원수(元壽) 원년
○봄 낙랑(樂浪)이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을 침범하였다.
○여름 4월 백제가 국모(國母)의 묘(廟)를 세웠다.
[권근이 말하기를,]
“국가를 둔 자가 반드시 종묘(宗廟)를 세워서 그 선대에 제사하는 것은 예(禮)이다. 국모(國母)는 자연히 예묘(○廟)에 배식(配食)되어야 타당하고, 별도로 묘(廟)를 세워 제사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별도로 중자(仲子)를 위하여 묘(廟)를 세우니, 《춘추(春秋)》에 그것을 비난하였다. 지금 백제가 이미 동명왕(東明王)의 묘를 세웠는데, 국모를 위하여 별도로 그 묘를 세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령 말하자면, 예(禮)에는 두 적실(嫡室)이 있을 수 없는데, 유리(類利)의 어머니가 이미 동명왕에게 배향되었기 때문에 온조(溫祚)가 어쩔 수 없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별도로 묘를 세워서 제사지낸다면, 동명왕의 묘가 고구려에 있으므로 백제는 고구려를 종국(宗國)으로 삼아서, 별도로 동명왕에게 제사지낼 수 없는 것을 마땅히 기자(夔子)가 축융(祝融)과 육웅(○熊)을 제사지내지 않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기夔는 고대에 초楚나라와 성이 같은 소국小國으로, 축융祝融은 초나라의 시조始祖이고 육웅○熊은 초나라의 중조中祖이니, 곧 기나라의 시조와 증조도 됨). 만약 스스로 별도로 종통(宗統)을 삼아서 동명왕의 묘를 세웠다면, 다른 나라의 어머니를 배향하고서 별도로 자기 어머니에게 제사지낸다는 것은 부당한 것이니, 온조가 이에서 모두 실수한 것이다.” 하였다.
경신년(己未年; 1)
신라 시조 57년, 고구려 유리왕 19년, 백제 시조 18년
한나라 애제 원수 2년
○가을 8월 고구려에서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서 뒤쫓게 하였는데, 장옥(長屋) 못 가운데[澤中]에 이르러 붙잡고는 그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렸으므로,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犧牲)을 어찌하여 상처를 낸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두 사람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가을 9월 왕이 병이 나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의 빌미[崇]입니다.”
하므로, 왕이 그들에게 사과하게 하니, 곧 병이 쾌유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교(郊)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천자(天子)의 예(禮)이다. 고구려가 조그마한 하국(下國)으로서 외람되게 그 예를 행하였으니, 하늘이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희생은 기르는 것이 반드시 그 장소가 있고, 관장하는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이 있는데, 교제에 쓸 돼지가 두세 번이나 달아났으니, 하늘이 그 제사를 받지 않는다는 뜻을 보인 것이 분명하다. 대저 하늘이란 이치가 있는 곳으로 신(神)은 예가 아니면 흠향(歆饗)하지 않는다. 고구려왕은 이치를 따라서 어긋남이 없게 하고, 예를 좇아 분수를 넘지 않으며, 대단히 조심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임을 알지 못하고서, 이에 감히 의리가 아니게 분수를 넘어 참람하게 천자의 예를 범하였으니, 이미 실수이다. 그리고 한 마리 돼지 때문에 드디어 두 사람을 죽였으니, 이렇게 해서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도리어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그가 질병을 얻는 것이 어찌 반드시 두 사람의 빌미이겠는가?”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靺鞨)이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酋長)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馬韓)으로 보내고, 그 남은 무리는 구덩이에 묻었다.
○겨울 11월 백제왕이 낙랑(樂浪)의 우두 산성(牛頭山城)을 엄습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임술년(壬戌年; 2)
신라 시조 59년, 고구려 유리왕 21년, 백제 시조 20년
한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
○봄 2월 백제왕이 큰 단(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이로부터 매년 사중월(四仲月)에 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봄 3월 고구려에서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므로, 왕이 희생을 맡은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는데,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잡아 가지고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臣)이 위나암에 이르러 그 산수(山水)가 깊고 험준한 것을 보건대 토지는 오곡(五穀)을 심기에 적합하고, 또 미록(○鹿)과 어별(魚鼈)이 많으니,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신다면 오직 백성의 이득이 무궁할 뿐 아니라 병란(兵亂)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가을 9월 고구려왕이 국내(國內)에 가서 지형을 살펴보았다.
계해년(癸亥年; 3)
신라 시조 60년, 고구려 유리왕 22년, 백제 시조 21년
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겨울 12월 왕이 질산(質山)에서 사냥하고 5일 동안이나 돌아가지 않자,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기를,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기어 백성들이 안심하고 지내지 못하니, 의당 덕정(德政)을 베풀어 이들을 보살펴야 할 것인데 말을 달려 사냥하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으시니, 만일 잘못을 고치지 않으시면 신은 정사가 황폐되고 백성이 흩어져서 선왕(先王)의 기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하매, 왕이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하였다. 협보는 남한(南韓)으로 달아났다.
갑자년(甲子年; 4)
신라 시조 61년·남해왕 원년, 고구려 유리왕 23년, 백제 시조 22년
한나라 평제 원시 4년
○봄 2월 고구려왕이 아들 해명(解明)을 세워 태자로 삼고, 대사(大赦)하였다.
○봄 3월 신라왕 혁거세(赫居世)가 훙(薨)하고, 7일이 지나 왕비 알영(閼英)이 훙하였다. 태자 남해(南解)가 왕위에 올라 차차웅(次次雄)이라 호칭하고 원년으로 일컬었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즉위하여 해를 넘어서 원년(元年)이라 칭하는 것[踰年稱元]은 그 법이 《춘추(春秋)》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는 선왕(先王)의 고치지 못할 법칙이다. 이훈(伊訓)에 이르기를, ‘성탕(成湯)이 이미 몰(歿)하니 태갑(太甲) 원년(元年)이라.’ 하였고, 정의(正義)에는 이르기를, ‘성탕이 이미 몰하니 그 해가 곧 태갑 원년이라.’ 하였다. 그러나《맹자(孟子)》에 이르기를, ‘탕왕(湯王)이 붕(崩)하였는데, 태정(太丁)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외병(外丙)은 2년, 중임(仲壬)은 4년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상서(尙書)》에는 탈간(脫簡)이고 정의에는 잘못 설명한 것 같다. 혹은 말하기를, ‘옛날에는 인군(人君)이 즉위하면 혹은 달을 넘어 원년이라 칭하고 혹은 해를 넘어서 원년이라 칭하였다.’ 하였는데, 달을 넘어서 원년이라 칭한 것은 ‘성탕이 이미 몰하니 태갑 원년이라.’ 한 것이 곧 이것이요, 《맹자》에 ‘태정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태정은 즉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요, ‘외병 2년, 중임 4년’이니 한 것은 모두 태정의 아들인 태갑(太甲)의 두 형이 혹은 2년, 혹은 4년 살다가 죽었음을 이름이니, 태갑이 탕왕의 뒤를 계승하게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사기(史記)》에 문득 이 중임·외병을 두 임금으로 한 것은 잘못이다. 전자(前者)에 연유한다면 선군(先君)이 죽은 해에 즉위하여 원년으로 칭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후자(後者)에 연유한다면 상(商)나라 사람의 예를 얻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삼국(三國)의 고사(古史)를 살펴보건대, 모두 선왕(先王)의 훙(薨)한 해로써 사왕(嗣王)의 원년을 삼았다. 고려의 신(臣)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三國史)를 찬술하면서도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논(論)하기를, ‘인군(人君)이 즉위하여 해를 넘어서 원년으로 칭하는 것은, 이는 선왕의 고치지 못하는 법칙이다.’라고 하였으니, 선군이 죽은 해에 즉위하여 원년으로 칭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제라도 결단코 임금이 훙한 다음해로 사왕(嗣王)의 원년을 삼아야 거의 《춘추》에 ‘한 해에 두 임금으로 할 수 없다.’는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신 등은 살펴보건대,]
“국군(國君)이 세계(世系)를 이어받을 경우 해를 넘어 개원(改元)하는 것이 바로 예의 정당한 것입니다. 만일 훙한 해에 개원한다면 이는 한 해 안에 나라에 두 임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선비들이 《상서(尙書)》 소서(小序)의 글에 현혹되어 곧 탕(湯)이 붕(崩)한 다음달을 태갑(太甲) 원년으로 삼으니, 소씨(蘇氏)가 ‘붕한 해에 개원하는 것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하였고, 호씨(胡氏)·채씨(蔡氏)도 그에 대한 변론을 이미 상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부식이 도리어 한나라 선비들의 설(說)을 옳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권근이 《사략(史略)》에 구사(舊史)를 고쳐 해를 넘어 원년으로 칭하여 거의 《춘추》의 뜻을 얻었습니다. 그러나《삼국사》가 상하 1천 년간을 편년(編年)으로 일을 기록한 범례가 훙한 해로써 원년을 삼았으니, 지금 만약 구사를 놓아두고 《사략》을 따르면 그 사적을 기록하는 데에 자못 서로 어긋나 사실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사에 따라 썼습니다.”
○신라가 시조를 사릉(蛇陵)에 장사(葬事)지냈다.
○가을 7월 낙랑(樂浪)의 군사가 신라의 금성(金城)을 포위하니, 왕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성(二聖, 혁거세와 알영)이 세상을 떠나시고 부덕(不德)한 내가 잘못 왕위에 있게 되었는데, 이제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어찌할까?”
하매, 좌우에서 말하기를,
“적(賊)이 우리의 상사(喪事)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감히 군사로써 침범해 오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적이 과연 물러갔다.
○가을 9월 백제왕이 기병(騎兵) 1천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말갈(靺鞨)을 만나 한번 싸워서 격파하고 노획(虜獲)한 생구(生口)는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병인년(丙寅年; 6)
신라 남해왕 3년, 고구려 유리왕 25년, 백제 시조 24년
한나라 왕망(王莽) 거섭(居攝) 원년
○봄 정월 신라가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가을 7월 백제가 웅천책(熊川○)을 세우니, 마한왕(馬韓王)이 사신을 보내어 꾸짖기를,
“왕이 처음 물을 건너올 적에 발붙일 곳도 없는 것을 내가 동북쪽으로 1백 리의 땅을 갈라 주었으니, 왕을 대접한 것이 후하지 않다고는 못할 것이므로, 의당 보답함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이제 나라가 완고(完固)해지고 백성이 모이게 되자, 자신에게 대적할 자가 없다고 여겨서 큰 성지(城池)를 설치하며 우리의 봉강(封疆)을 침범하니, 그 의리에 있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백제왕이 부끄러워하여 드디어 그 성책을 허물었다.
정묘년(丁卯年; 7)
신라 남해왕 4년, 고구려 유리왕 26년, 백제 시조 25년
한나라 왕망 거섭 2년
○봄 2월 백제에서 왕궁(王宮)의 샘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漢城)의 인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샘물이 넘치는 것은 대왕께서 발흥(勃興)할 조짐이고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응험(應驗)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병탄(幷呑)할 마음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