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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戊辰年; 8)

신라 남해왕 5년, 고구려 유리왕 27년, 백제 시조 26년

한나라 왕망 초시(初始) 원년

 

봄 정월 신라왕이 장녀(長女)를 석탈해(昔脫解)에게 시집보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 사람인데,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에 있었다. 처음에 그 국왕(國王)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그를 버리게 하였는데, 여인이 비단으로 싸고 보물(寶物)과 아울러 궤짝 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내버려두었다. 처음 금관국(金官國) 해변(海邊)에 가서 닿으니,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서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렀는데, 어떤 노구(老軀)가 줄로 끌어다가 (해안海岸에) 매고 궤를 열어 보니, 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 드디어 그를 길렀다. 장성하게 되어서는 신장이 9척에 풍신(風神)이 빼어나고 지혜와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다. 궤가 처음 올 때에 까치가 따라와 지저귀고 있었으므로 ‘작(鵲)’ 자를 생략하여 석(昔)으로 씨(氏)를 삼고, 궤짝을 풀어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고 이름하였다. 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아 노구(老軀)를 봉양하는 데에 게으른 빛이 없었는데, 노구가 말하기를,

 

“너는 골상(骨相)이 특이하여 보통 사람이 아니니, 마땅히 학문에 힘써 공명(功名)을 세우라.”

하니, 탈해가 드디어 학문에 오로지 정진하여 겸하여 지리(地理)를 통하게 되었다. 양산(楊山) 밑에 있는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吉地)로 여겨 계책을 써서 취득하여 그 곳에 살게 되었는데, 왕이 그의 어짊을 듣고는 그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다.

 

봄 3월 고구려의 태자(太子) 해명(解明)이 황룡국(黃龍國)에 갔다가 돌아왔다. 처음에 왕이 도읍을 옮길 때에 해명은 옮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고도(古都)에 머물러 있었는데, 힘이 있어 용맹을 좋아하였다. 황룡국왕(黃龍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강궁(强弓)을 주었다. 해명이 그 사신을 대하여 활을 당기어 꺾으며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할 뿐이다.”

 

라고 하니, 황룡왕(黃龍王)이 부끄러워하였다. 고구려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황룡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해명이 자식이 되어 효도를 하지 않으니, 청컨대 과인(寡人)을 위하여 그를 죽여주십시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어 태자와 서로 만나기를 청하므로, 태자는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간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지금 이웃 나라에서 까닭 없이 보기를 청하니, 그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왕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며, 드디어 가니, 황룡왕이 그를 보고서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우하여 보냈다.

 

가을 7월 백제왕이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마한(馬韓)이 점차 약해져서 상하(上下)의 마음이 이탈되었으니,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다른 나라에게 멸망하여 우리에게 해가 미치는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남보다 먼저 그를 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겨울 10월 거짓으로 사냥을 나가는 것처럼 하였다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엄습하여 드디어 그 나라(마한)를 합병하였다. 그러나 오직 원산(圓山)·금현(錦峴) 두 성(城)만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기사년(己巳年; 9)

신라 남해왕 6년, 고구려 유리왕 28년, 백제 시조 27년

신망(新莽) 시건국(始建國) 원년

 

봄 3월 고구려왕이 사람을 보내어 해명(解明)에게 이르기를,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굳센 힘을 믿고서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으니, 자식된 도리로 무슨 짓이냐?”

하고, 곧 칼을 주어 자재(自裁)하라고 하였다. 태자가 자살하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대왕의 장자(長子)는 이미 졸(卒)하였으니, 태자가 당연히 뒤를 이어야 할 것인데, 지금 사자(使者)가 한번 왔다고 해서 자살한다면 어찌 속는 것이 아닌지 알겠습니까?”

 

하자, 태자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룡왕이 강궁(强弓)을 보냈을 때에 그가 우리나라를 경멸하는 것을 노여워하여 그것을 꺾은 것인데, 뜻밖에 부왕(父王)에게 꾸지람을 당하게 되고, 지금 부왕께서 나를 효도하지 않는다 하여 칼을 주며 자재하라고 하시는데, 아버지의 명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곧 여진(礪津)의 동원(東原)으로 가서 창(槍)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달려 창에 부딪쳐 죽으니,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마땅히 좌우에서 떠나지 않고 효도를 다하기를, 문왕(文王)이 세자(世子)로 있었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그런데 해명은 다른 도읍에 있으면서 용맹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소문이 났으니, 그가 죄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전(傳)에 이르기를, ‘자식을 사랑하되 옳은 방법으로 가르쳐서 사악(邪惡)한 데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왕은 처음부터 일찍이 가르치지 않고 있다가 그가 나쁘게 되기에 이르러서야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여 그를 죽이고야 말았으니,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여름 4월 마한(馬韓)의 원산(圓山)·금현(錦峴) 두 성(城)이 백제에게 항복하여 그 백성을 한산(漢山)으로 옮기니, 마한은 망하였다.

 

[신 등은 살펴보건대,]

“주(周)나라 무왕(武王) 기묘년(己卯年; 서기 전 1122)에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는데,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9백여 년 동안 서로 이어 왔습니다. 40대손(代孫) 비(否)에 이르러 진(秦)나라 시황(始皇) 26년 경진년(庚辰年; 서기 전 221)을 당해서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복속(服屬)되었으며, 비가 죽고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후 29년 한(漢)나라 혜제(惠帝) 무신년(戊申年; 서기 전 193)에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를 모아 공격하니, 준이 바다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서 금마군(金馬郡)에 이르러 그 곳에 도읍하고는 마한이라 일컬었으며, 50여 국을 통솔하였는데, 사군(四郡)·이부(二府)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세대를 전한 것이 또한 2백 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이르러 백제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기씨(箕氏)가 서로 전한 것을 전후로 통합하면 대체로 1천여 년이었습니다. 그가 오랜 세대를 전하여 온 것이 이와 같게 된 것은 무릇 어찌 연유가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대개 우리나라에 기자가 구주(九疇)의 밝은 학문과 주(周)나라에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고결한 지조로써 많은 사람을 데리고 동쪽으로 돌아와서 팔조(八條)의 교육을 펴고 정전(井田)의 제도를 행하였으니, 그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덕택은 진실로 민심을 결집하고 국맥(國脈)을 오래도록 전하여 멀리 뻗도록 하기에 넉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동방 예속(禮俗)의 아름다움이 천하에 알려지자, 공자[夫子]도 그 곳에 살고 싶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한사(漢史)에는 인현(仁賢)의 교화(敎化)를 칭하였고, 당서(唐書)에는 ‘군자의 나라’로 찬미하였으며, 송조(宋朝)에서는 ‘예악 문물(禮樂文物)의 나라’라고 하였고, 함허자(涵虛子)는 또한 말하기를, ‘시서 인의(詩書仁義)의 나라이다.’라고 하였으니, 우리 기자가 지나는 곳에는 감화되고, 지니고 있는 신명(神明)의 오묘함을 우리 동방(東方)에 베푼 것은 천만 년을 지나도 하루 같사온데, 전적(典籍)에 실려 전한 데가 없어서 문헌(文獻)에 징거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합니다. 지금 마한이 멸망함에 있어 김부식(金富軾)과 권근(權近)이 모두 기군(箕君)의 시종(始終)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기자와 같은 성덕(聖德)으로도 자손이 미약하여 파천(播遷)된 하루아침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멸절(滅絶)되었으니, 또한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가을 8월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을 꾸짖기를,

“우리의 선왕(先王)께서 그대의 선군(先君) 동명왕(東明王)과 서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곧 우리의 신료(臣僚)를 꾀어 도망쳐서 남쪽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무릇 나라에는 대소(大小)가 있고 사람에게는 장유(長幼)가 있으니,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禮)이고, 어린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이다. 지금 왕이 예와 순리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社稷)을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

 

하니, 고구려왕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지가 시일이 짧아서 백성과 군사가 잔약(孱弱)하므로 굴복하는 뜻을 보였다가 후일의 효과를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어 답하기를,

“과인이 궁벽하게 바다 모퉁이에 있어 예의(禮義)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 명을 받고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왕자(王子) 무휼(無恤)이 아직 어렸으나 왕이 잘못 대답하는 것을 듣고는 스스로 부여의 사자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나서부터 신령스럽고 특이하였으며 어질고 재주가 많았는데도, 대왕께서 부왕(父王)에게 참소하여 선조를 목마(牧馬)하는 일로 욕보였습니다. 선조께서는 기미를 보고 나오신 것인데, 이제 대왕은 전날의 잘못을 생각지 않고 다만 군사의 강한 것만을 믿고서 우리나라를 경멸하니, 청컨대 사자는 돌아가 대왕에게 보고하되, ‘지금 여기에 알[卵]을 쌓아 놓은 것이 있는데, 만약 대왕께서 그 알을 허물지 않으면 내가 장차 섬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대소가 그 말을 듣고서 여러 신하에게 두루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데, 한 노구(老軀)가 대답하기를,

“‘알을 쌓아 놓았다.’ 함은 위태한 것이요, ‘허물지 않는다.’는 것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그 뜻을 말할 것 같으면 ‘왕은 자신의 위태함을 알지 못하고 남이 자기를 섬기도록 하려고 하니, 위태함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면서 스스로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0)

신라 남해왕 7년, 고구려 유리왕 29년, 백제 시조 28년

신망 시건국 2년

 

봄 2월 백제가 원자(元子) 다루(多婁)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가을 7월 신라가 탈해(脫解)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국 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임신년(壬申年; 12)

신라 남해왕 9년, 고구려 유리왕 31년, 백제 시조 30년

신망 시건국 4년

 

○왕망(王莽)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치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사가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으로 나가서 요서(遼西)를 침범하였다.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게 되매, 왕망이 노하여 토벌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기를,

“고구려 사람들이 법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그들을 위안(慰安)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대죄(大罪)를 입히게 되면 아마도 그들은 마침내 배반할 것이고, 부여(扶餘)의 족속도 반드시 이들에게 부화(附和)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흉노(匈奴)도 쳐서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 장수 후추(侯騶)를 꾀어서 그를 처참하여 머리를 경사(京師)에 전하니, 왕망이 기뻐하였다. 고구려를 강등해 봉하여 하구려후(下句麗侯)로 삼고 천하에 포고하였는데, 이에 한(漢)나라의 변지(邊地)를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3)

신라 남해왕 10년, 고구려 유리왕 32년, 백제 시조 31년

신망 시건국 5년

 

겨울 11월 부여가 고구려를 침범하니, 왕이 아들 무휼(無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으므로 대적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기계(奇計)를 내어 산골짜기에 복병시키고 적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여의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렀다. 복병이 그를 불의에 일어나 치니, 부여의 군사는 대패(大敗)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무휼이 군사를 풀어놓아 그들을 다 죽였다.

 

갑술년(甲戌年; 14)

신라 남해왕 11년, 고구려 유리왕 33년, 백제 시조 32년

신망 천봉(天鳳) 원년

 

봄 정월 고구려왕이 아들 무휼(無恤)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고구려왕이 오이(烏伊)·마리(摩離)를 보내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양맥(梁貊)을 쳐서 멸하였다.

○왜(倭)가 신라의 변군(邊郡)을 침범하니, 신라가 6부(六部)의 강력한 군사 1천 인을 징발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樂浪)이 그 허술한 것을 틈타서 금성(金城)을 급하게 공격하였는데, 밤에 유성(流星)이 적(賊)의 진영에 떨어지니 적이 두려워하여 물러나서 알정(閼井) 가에 주둔하였다가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六部)의 추격하던 군사가 알천(閼川)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이 많은 줄로 알고 곧 정지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

신라 남해왕 13년, 고구려 유리왕 35년, 백제 시조 34년

신망 천봉 3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니, 왕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을 매자 그 시신을 요참(腰斬)하고, 아울러 처자까지 죽였다.

 

무인년(戊寅年; 18)

신라 남해왕 15년, 고구려 유리왕 37년·대무신왕 원년, 백제 시조 36년

신망 천봉 5년

 

여름 고구려에 소속되었던 7국(七國)이 신라에 투항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 유리(類利)가 훙(薨)하자,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 호칭하였다. 태자 무휼(無恤)이 즉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9)

신라 남해왕 16년, 고구려 대무신왕 2년, 백제 시조 37년

신망 천봉 6년

 

여름 4월 백제는 가물었다가 6월에 가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 동북 부락(東北部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하여 들어간 자가 1천여 호(戶)였다. 패수(浿水)와 대방(帶方) 사이는 텅 비어 거주하는 백성이 없었다.

 

경진년(庚辰年; 20)

신라 남해왕 17년, 고구려 대무신왕 3년, 백제 시조 38년

신망 지황(地皇) 원년

 

봄 2월 백제왕이 경내(境內)를 순무(巡撫)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까지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또 사신을 보내어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으면서 백성을 소요스럽게 하는 일을 제거하게 하였다.

 

봄 3월 고구려에서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겨울 10월

○ 부여왕 대소(帶素)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붉은 까마귀[赤烏]를 보냈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치니, 혹자가 말하기를,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인데 변하여 붉어졌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아마도 고구려를 겸병(兼幷)하시겠습니다.”

하니, 대소가 기뻐하여 이를 보내면서 겸하여 혹자가 말한 것을 알리니, 왕이 회보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빛인데 지금 변하여 남방의 빛이 되었고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은 것을 갖지 않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存亡)은 알 수 없다.”

하니, 대소가 후회하였다.

○백제가 큰 단(壇)을 쌓고 천지(天地)에 제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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