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년(壬午年; 22)
신라 남해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5년, 백제 시조 40년
신망 지황(地皇) 3년
○봄 2월 고구려왕이 부여왕 대소를 공격하여 죽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렀을 때 밤에 쇳소리를 듣고 금새(金璽)와 병기(兵器) 등 물품을 찾아 얻으니,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다.”
하고 절하여 받았다. 그리고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신장이 9척이고 얼굴은 희며 눈에는 빛이 있었다. 왕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신은 바로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치신다고 하니, 신도 청컨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취하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허락하였다. 이에 이르러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進軍)하였는데, 그 곳은 수렁이 많으므로, 왕이 평지를 택하여 진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어 군사를 쉬게 하였다. 부여왕은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출전(出戰)하여 대비하지 못하였을 때에 엄습하려고 하여 말을 채찍질하며 전진하다가 수렁에 빠져서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고구려왕이 괴유를 지휘하여 나아가게 하니, 괴유가 칼을 빼어 들고 크게 부르짖으며 공격하자, 적은 모두 쓰러져 지탱하지 못하였다. 괴유가 곧바로 나아가 부여왕의 머리를 베었으나 부여 사람은 오히려 굽히지 않고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을 포위하였다. 고구려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가 굶주리므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갑자기 안개가 많이 끼어 지척에서도 인물(人物)을 분간하지 못하기가 7일이나 계속되므로, 왕이 우인(偶人)을 만들어 병기(兵器)를 잡혀서 군영 내외에 진열하게 한 다음 군사로 가장해 놓고 사잇길로 잠복한 군사를 따라서 밤에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에 여러 신하들을 모아 술을 마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부덕한 내가 부여를 가볍게 쳐서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는 섬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의 군자(軍資)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과실이다.”
하고, 드디어 친히 죽은 사람을 조상(弔喪)하고 병든 사람을 문병하며 백성을 위안하니, 나라 사람들이 감복하여 기뻐하였다.
○여름 4월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왕은 금와왕(金蛙王)의 계자(季子)인데, 사기(史記)에는 그 이름이 실전(失傳)되었다. 이에 이르러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하였다.
○가을 7월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자신이 망하고 나라는 멸하여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으며, 왕의 아우는 보존을 도모할 생각도 못하고 도찬(逃竄)하여 밖으로 나가서 갈사수에 도읍하였다. 그리고 나 역시 불초하여 흥복(興復)시킬 길이 없다.”
하고, 이에 1만여 인과 더불어 고구려에 투항(投降)하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두었으며,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다고 하여 낙씨(絡氏)란 성(姓)을 내렸다.
□겨울 10월
○ 고구려 장수 괴유(怪由)가 졸(卒)하였다. 괴유의 병이 위급하자, 왕이 친히 임하여 존문(存問)하니, 괴유가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감히 보답할 것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곧 졸하였다. 왕이 전일의 공을 생각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해 북명산(北溟山) 양지에 장사지내고 때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말갈(靺鞨)이 백제의 부현성(斧峴城)을 엄습하여 1백여 인을 살상하고 노략질하므로, 왕이 강력한 기병(騎兵) 2백에게 명하여 막아 치게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23)
신라 남해왕 20년, 고구려 대무신왕 6년, 백제 시조 41년
한나라 유현(劉玄) 경시(更始) 원년
○봄 정월 백제의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졸하니, 북부(北部)의 해루(解婁)로 그를 대신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扶餘) 사람인데, 신식(神識)이 깊고, 나이가 70이 넘었으나 여력(?力)이 줄지 않았다.
갑신년(甲申年; 24)
신라 남해왕 21년·유리왕 원년, 고구려 대무신왕 7년, 백제 시조 42년
한나라 유현(劉玄) 경시(更始) 원년
○가을 신라왕 남해(南解)가 훙(薨)하고, 태자 유리(儒理)가 즉위하였다. 남해가 장차 훙할 때 유리와 사위인 석탈해(昔脫解)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희 박·석 두 성(姓)이 나이 많은 순서로 왕위를 이으라.”
하였다. 훙하기에 미쳐 유리는 탈해가 덕망이 있다고 사양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왕위[神器]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듣건대 거룩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합니다.”
하므로, 시험삼아 떡을 씹어 보니 유리가 이가 많았다. 이에 그를 왕위에 올려 이사금(尼師今)이라 호칭하였다.
을유년(乙酉年; 25)
신라 유리왕 2년, 고구려 대무신왕 8년, 백제 시조 43년
한나라 광무(光武) 건무(建武) 원년
○가을 9월 백제에서 기러기 떼가 왕궁(王宮)에 모여드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니, 장차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와서 투항할 것입니다.” 하였다.
○겨울 10월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이르러 정성을 바치니, 왕이 이들을 한산(漢山) 서쪽에 두었다.
병술년(丙戌年; 26)
신라 유리왕 3년, 고구려 대무신왕 9년, 백제 시조 44년
한나라 광무 건무 2년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그 땅으로 군현(郡縣)을 삼았다.
○겨울 12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개마국이 멸하였다는 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온 나라가 와서 항복하니, 고구려의 땅이 점차 넓어졌다.
정해년(丁亥年; 27)
신라 유리왕 4년, 고구려 대무신왕 10년, 백제 시조 45년
한나라 광무 건무 3년
○봄 정월 고구려가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무자년(戊子年; 28)
신라 유리왕 5년, 고구려 대무신왕 11년, 백제 시조 46년·다루왕 원년
한나라 광무 건무 4년
○봄 2월 백제 시조 온조(溫祚)가 훙(薨)하고, 태자 다루(多婁)가 즉위하였다.
○가을 7월 한(漢)나라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므로,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싸워 지킬 계책을 물으니, 우보(右輔) 송옥구(松屋句)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은 흉년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고 있는데, 명분 없이 군사를 출동시키니, 이는 반드시 변방 장수가 이(利)를 엿보고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침범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스르고 사람을 어기면 군사가 반드시 공이 없을 것이니, 험한 곳에 의지하여 기계(奇計)를 내게 되면 격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소적(小敵)은 강해봤자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 군사가 어느 쪽이 많은가를 헤아려보건대, 계책으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매, 왕이 말하기를,
“계책으로 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한나라 병사가 멀리 나와 싸우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스스로 굳건히 하였다가 그 군사들의 피로함을 기다려서 공격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자, 왕이 그렇겠다고 여겨 위나암성(尉那巖城)에 들어가 수 십일 동안 굳게 지켰는데, 한나라 병사는 포위를 풀지 않으므로, 왕은 힘이 다하고 군사가 피곤해지자, 을두지에게 이르기를,
“형세가 더 이상 지킬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을두지가 말하기를,
“한나라 군사는 우리가 있는 성이 암석(巖石)으로 되어 있어 반드시 수천(水泉)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오래도록 포위하여 우리가 피곤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마땅히 못 가운데 있는 고기를 잡아서 수초(水草)로 싸고 겸하여 술과 같이 보내어 먹이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대로 따라 서찰을 보내 말하기를,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上國)에 죄를 얻어서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피폐한 국경에서 폭로(暴露)하게 하면서도 후한 뜻에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감히 변변치 못한 물품이나마 좌우(左右)에 제공합니다.”
하니, 이에 한나라 장수가 ‘성안에 물이 있어서 갑자기 성을 빼앗을 수 없겠다.’고 여기어, 곧 회보하기를,
“황제(皇帝)께서 신을 노둔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군사를 출동시켜 죄를 묻게 하였으나, 경내에 온 지 열흘이 넘도록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보내 온 글 뜻을 듣건대 말이 순하고 또 공손하니, 감히 이러한 것으로써 돌아가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겨울 11월 신라왕이 국내(國內)를 순행하다가 한 늙은 노파가 얼고 굶주려서 장차 죽게 된 것을 보고 왕이 말하기를,
“내가 하찮은 몸으로 위에 있으면서 능히 백성을 양육하지 못하여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렇게 극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하고, 옷과 먹을 것을 내려 주었다. 이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과 늙고 병들어 능히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를 존문(存問)하고 진휼하여 주도록 하니,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듣고 오는 자가 많았다.
경인년(庚寅年; 30)
신라 유리왕 7년, 고구려 대무신왕 13년, 백제 다루왕 3년
한나라 광무 건무 6년
○겨울 10월 백제 동부(東部)의 흘우(屹于)가 말갈(靺鞨)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그를 이기어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馬] 10필(匹)과 조(租) 5백 석(石)을 상으로 주었다.
신묘년(辛卯年; 31)
신라 유리왕 8년, 고구려 대무신왕 14년, 백제 다루왕 4년
한나라 광무 건무 7년
○가을 8월 백제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靺鞨)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다.
임진년(壬辰年; 32)
신라 유리왕 9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백제 다루왕 5년
한나라 광무 건무 8년
□봄
○신라가 6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이어서 성(姓)을 내렸다. 양산부(楊山部)를 급량(及梁)이라 하였는데 성(姓)은 이(李)이고, 고허부(高墟部)는 사량(沙梁)이라 하였는데 성은 최(崔)이며, 대수부(大樹部)는 점량(漸梁)이라 하였는데 성은 손(孫)이고, 우진부(于珍部)는 본피(本彼)라 하였는데 성은 정(鄭)이며, 가리부(加利部)는 한기(漢祇)라 하였는데 성은 배(裵)이고, 명활부(明活部)는 습비(習比)라 하였는데 성은 설(薛)이라 하였다. 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가운데를 나누어 둘로 만들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고는 7월에 기망(旣望, 음력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績麻]을 하되 밤중이 되어야 파하게 하였다. 8월15일에 이르러 공적의 많고 적음을 상고하여 진 사람은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놓고 이긴 사람에게 사례하며, 서로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온갖 유희(遊戱)가 다 시작되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신라가 관직(官職)을 설치하여 17등을 두었다. 1은 이벌찬(伊伐飡), 2는 이척찬(伊尺飡), 3은 잡찬(?飡), 4는 파진찬(波珍飡), 5는 대아찬(大阿飡)이니, 모두 진골(眞骨)에게 제수되는데, 진골은 왕족(王族)이다. 6은 아찬(阿飡)이니 중아찬(重阿飡)으로부터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이다. 7은 일길찬(一吉飡), 8은 사찬(沙飡), 9는 급벌찬(級伐飡), 10은 대내마(大奈麻)이니, 중대내마(重大奈麻)로부터 구중대내마(九重大奈麻)까지이다. 11은 내마(奈麻)이니 중내마(重奈麻)로부터 칠중내마(七重奈麻)까지이다. 12는 대사(大舍), 13은 사지(舍知), 14는 길사(吉士), 15는 대오(大烏), 16은 소오(小烏), 17은 조위(造位)이다.
○봄 2월 고구려가 남부 사자(南部使者) 추발소(鄒?素)를 비류 부장(沸流部長)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구도(仇都)·일구(逸苟)·분영(焚永) 3인이 비류 부장이 되었었는데,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남의 처첩(妻妾)과 재화(財貨)를 빼앗는 등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자행(恣行)하면서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채찍질하니, 사람들이 분노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왕은 그들이 시조(始祖)의 옛 신하였기 때문에 차마 법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다만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으며, 추발소로 그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추발소가 큰 거실(居室)을 만들어 스스로 거처하면서 구도 등 죄인들을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니, 3인이 추발소에게 나아가 사죄하기를,
“우리들 소인이 왕법(王法)을 범하였으니, 부끄러워서 후회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공이 허물을 용서하여 스스로 새로움을 얻게 하여 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추발소가 이들을 이끌어 함께 앉아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허물이 있어 능히 고치면 이보다 더 큰 착함이 없는 것이다.”
하고, 이에 벗이 되기를 허락하니, 구도 등이 감복하고 부끄러워하여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도 능히 지혜로써 악한 사람을 징계하였으니, 어질다고 말할 만하다.”
하고, 대실씨(大室氏)라고 성(姓)을 내려 주었다.
○여름 4월 고구려가 낙랑(樂浪)을 엄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유람하였는데, 낙랑주(樂浪主) 최이(崔理)가 마침 보고 호동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용모를 보니 반드시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같이 돌아와 딸로써 처(妻)를 삼아 주었다. 낙랑에 고각(鼓角)이 있는데, 만약 적병(敵兵)이 이르게 되면 저절로 울리었다. 호동이 장차 돌아올 때 몰래 여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무고(武庫)에 들어가 고각을 베고 파괴시키면 내가 예(禮)로써 맞이할 것이오.”
하니, 여인이 몰래 무고에 들어가 북의 피면(皮面)을 베고 취각(吹角)의 주둥이를 파괴시키고는 호동에게 알리니, 호동은 돌아와 왕에게 낙랑을 엄습하도록 권하였다. 최이는 고각이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못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사가 문득 성 아래에 이르게 되어서야 곧 고각이 모두 파괴된 것을 알았다. 드디어 딸을 죽이고 나아가 항복하였다.
○겨울 11월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이 자살(自殺)하였다. 처음에 왕이 갈사왕(曷思王)의 손녀를 맞아들여 비(妃)로 삼아서 호동을 낳았는데, 용모가 아름답게 잘 생겨 왕이 그를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호동’이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원비(元妃)는 적통(嫡統)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왕에게 참소하기를,
“호동이 첩에게 무례하게 굴려고 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출산하였다고 하여 그를 미워하느냐?”
하였다. 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울며 고하기를,
“청컨대 대왕께서는 은밀히 살펴보소서. 첩이 만약 진실이 아니면 첩이 당장 복죄(伏罪)하겠습니다.”
하니, 이에 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차 그를 죄주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스스로 변명하지 않는가?”
하니, 호동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변명하게 되면 이는 어머니의 나쁜 점을 드러내어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효도라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칼에 엎어져 죽었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지금 왕이 참소하는 말을 믿어 죄없는 사랑스런 아들을 죽였으니, 어질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동에게도 죄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비에게 꾸지람을 당할 때에는 의당 순(舜)이 그 아비 고수(??)에게 한 것과 같이 하여, 약간 때리는 매는 맞고 많이 때리는 매에는 달아나 아버지가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인데, 호동은 이렇게 할 줄을 알지 못하고 그러할 곳이 아닌 데에 죽었으니, 조금 삼갈 일에 집착하여 큰 의리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자(公子) 신생(申生)1)에게나 비교할 만할까?” 하였다.
○겨울 12월 고구려왕이 아들 해우(解憂)를 세워 태자로 삼고, 사신을 보내어 한(漢)나라에 조회(朝會)하니, 제(帝)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시켰다.
각주
1) 신생(申生):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태자(太子)임. 헌공이 여희(驪姬)를 총애하여 그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우려고 신생을 곡옥(曲沃)에 가 살게 하였는데, 뒤에 여희가 참소하므로, 신생이 자살하였음.
*동국통감(東國通鑑) 제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