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東國通鑑) 제2권
계사년(癸巳年; 33)
신라 유리왕 10년, 고구려 대무신왕 16년, 백제 다루왕 6년
한나라 광무 건무 9년
○봄 정월 백제왕이 원자(元子) 기루(己婁)를 세워 태자로 삼고, 사령(赦令)을 내렸다.
○봄 2월 백제가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영(令)을 내려 비로소 벼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34)
신라 유리왕 11년, 고구려 대무신왕 17년, 백제 다루왕 7년
한나라 광무 건무 10년
○봄 2월 백제의 우보(右輔) 해루(解婁)가 졸(卒)하니, 나이가 90세였다. 동부(東部)의 흘우(屹于)로 그를 대신하였다.
○가을 9월 말갈(靺鞨)이 백제의 마수성(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렀다.
정유년(丁酉年; 37)
신라 유리왕 14년,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백제 다루왕 10년
한나라 광무 건무 13년
○겨울 고구려가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낙랑인(樂浪人) 5천이 대방인(帶方人)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므로, 신라는 육부(六部)에 나누어 두었다.
경자년(庚子年; 40)
신라 유리왕 17년, 고구려 대무신왕 23년, 백제 다루왕 13년
한나라 광무 건무 16년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군사로 곡하(曲河) 서쪽에서 기다렸다가 요격하여 패퇴시키니,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임인년(壬寅年; 42)
신라 유리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백제 다루왕 15년
한나라 광무 건무 18년
□봄 3월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 김수로(金首露)가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가락(駕洛)에 9간(九干)을 두었으니, 아도(我刀)·여도(汝刀)·피도(彼刀)·오도(五刀)·유수(留水)·유천(留天)·신천(神天)·신귀(神鬼)·오천(五天)이 각각 그 무리를 통솔하여 추장(酋長)이 되었다. 산야(山野)에 모여 살았으며, 군신(君臣)의 위호(位號)가 없었다. 9간이 계사(○事)1)를 닦고 마침 귀봉(龜峯)을 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으며, 또 공중(空中)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서 나아가 금합(金合)을 얻어 열고 보니 여섯 개의 금란(金卵)이 있었다. 하루가 못되어 모두 변화하여 남자가 되었는데, 체모(體貌)가 기위(奇偉)하고 장대(長大)하므로,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서 추대하여 세우게 되었다. 처음 나온 사람으로 주(主)를 삼고 금란으로 인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고 하였으며,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국호(國號)는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伽耶)라고도 칭하였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다섯 가야의 주가 되었는데, 아라가야(阿羅伽耶)·고령가야(高寧伽耶)·대가야(大伽耶)·성산가야(星山伽耶)·소가야(小伽耶)였으며, 가락은 뒤에 금관(金官)이라 고쳐서 칭하였다.
○신라가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하였다.
각주
1) 계사(○事): 3월 첫번째 사일(巳日)에 물가에 가서 액(厄)을 떨어버리고 복을 구하던 행사.
갑진년(甲辰年; 44)
신라 유리왕 21년, 고구려 대무신왕 27년·민중왕 원년, 백제 다루왕 17년
한나라 광무 건무 20년
○봄 2월 가락이 도성(都城)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었다.
○가을 9월 한(漢)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서 낙랑(樂浪)을 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북은 한나라에 귀속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훙(薨)하니,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칭하였다. 태자 해우(解憂)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왕의 아우 해읍주(解邑朱)를 왕위에 세웠다.
갑진년(甲辰年; 45)
신라 유리왕 22년, 고구려 민중왕 2년, 백제 다루왕 18년
한나라 광무 건무 21년
○봄 3월 고구려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병오년(丙午年; 46)
신라 유리왕 23년, 고구려 민중왕 3년, 백제 다루왕 19년
한나라 광무 건무 22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白獐]를 잡았다.
[권근이 말하기를,]
“후계자가 되는 것은 아들이 되는 것인데, 지금 민중왕(閔中王)이 무휼(無恤)을 이어 왕이 되었으니, 마땅히 아버지로 무휼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상(喪)을 당한 지 몇 달 안되어 여러 신하와 잔치를 하고, 상기(祥期)가 되지도 않아서 또 사냥을 하였으니, 그의 실수가 스스로 드러났다.” 하였다.
정미년(丁未年; 47)
신라 유리왕 24년, 고구려 민중왕 4년, 백제 다루왕 20년
한나라 광무 건무 23년
○여름 4월 고구려왕이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여름 7월 (고구려 왕이) 또 민중원에서 사냥하다가 석굴(石窟)을 보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여기에 장사지내고, 다시 능묘(陵墓)를 만들 필요가 없다.” 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잠지 부락(蠶支部落)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을 통하여 한(漢)나라에 투항하였다.
무신년(戊申年; 48)
신라 유리왕 25년, 고구려 민중왕 5년·모본왕 원년, 백제 다루왕 21년
한나라 광무 건무 24년
□봄
○고구려왕 해읍주(解邑朱)가 훙(薨)하니, 민중왕(閔中王)이라 칭하였다. 태자 해우(解憂)가 왕위에 올라 강포하고 패려하여 어질지 못하고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이 원망하였다.
○백제의 좌보(左輔) 흘우(屹于)가 졸(卒)하니, 왕이 통곡하며 몹시 애통해 하였다.
○가을 7월 가락국왕 김수로(金首露)가 허씨(許氏)를 맞이하여 비(妃)로 삼았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아들 익(翊)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기유년(己酉年; 49)
신라 유리왕 26년, 고구려 모본왕 2년, 백제 다루왕 22년
한나라 광무 건무 25년
○봄 고구려에서 장수를 보내어 한(漢)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대원(大原)을 엄습하였는데, 요동 태수(遼東太守) 채융(蔡○)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우하자 곧 다시 화친하였다.
신해년(辛亥年; 51)
신라 유리왕 28년, 고구려 모본왕 4년, 백제 다루왕 24년
한나라 광무 건무 27년
○고구려왕의 포학(暴虐)이 날로 더하여 여느 때나 앉으면 반드시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우면 사람을 베고 누웠는데, 사람이 혹 움직이면 문득 죽였으며,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한 몸과 같아서 서로 모름지기 편안하게 지내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예로써 서로 접하고 은혜로써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왕 해우(解憂)는 흉악하고 사나워 도가 없어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앉거나 누웠다가 움직이면 문득 죽이니, 죄악이 하늘에 가득하여 간하여 저지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과감하게 말하는 자는 반드시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내놓고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사람인데, 해우는 한갓 자기의 뜻에 거슬리는 것만 미워하였고, 자기를 아껴 주는 마음이 지극히 어려운 데서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모조리 베어 죽이는 난폭함과 패려함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었다. 예로부터 크게 무도(無道)한 임금이 아니고서는 간하는 신하를 경솔하게 죽이는 자가 있지 않았는데, 진(陳)나라 영공(靈公)이 예야(洩冶)를 죽이고 진(陳)나라 후주(後主)가 부재(傅縡)를 죽였으며, 당(唐)나라 희종(僖宗)이 상준(常濬)을 죽인 것은 모두 세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에 있었던 일이어서, 《춘추(春秋)》와 《강목(綱目)》에 그 사건을 그대로 기록하여 그 망하게 된 까닭을 드러냈다. 해우도 또한 오래지 않아서 내수(內竪) 두노(杜魯)에게 시해(弑害)를 당하였고, 또 그 세자(世子)도 불초하여 폐위되어 서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천하와 국가를 잃는 자에게는 마땅히 이것으로 점쳐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계축년(癸丑年; 53)
신라 유리왕 30년, 고구려 모본왕 6년·태조왕 원년, 백제 다루왕 26년
한나라 광무 건무 29년
○겨울 11월 고구려에서 두노(杜魯)가 그 임금 해우(解憂)를 시해하였다. 두노는 모본인(慕本人)으로, 왕을 좌우에서 모시면서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곧 통곡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는 남자로서 어찌 통곡을 하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后]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하였으니, 지금 왕이 포학한 짓을 행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이를 도모하라.”
하였다. 두노가 칼을 간직하고 왕 가까이에 가자, 왕이 이끌어 앉게 할 때 드디어 시해하였다. 태자 익(翊)이 어질지 못하여 사직(社稷)을 맡기기에는 부족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유리왕(琉璃王)의 아들인 재사(再思)의 아들 궁(宮)을 맞이하여 왕위에 세웠다. 궁은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당시 나이가 7세였으므로, 태후(太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였다. 태후는 부여인(扶餘人)이다.
병진년(丙辰年; 56)
신라 유리왕 33년, 고구려 태조왕 4년, 백제 다루왕 29년
한나라 광무 중원(中元) 원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땅을 취하여 읍(邑)으로 삼았다. 이에 국경을 개척한 것이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정사년(丁巳年; 57)
신라 유리왕 34년·탈해왕 원년, 고구려 태조왕 5년, 백제 다루왕 30년
한나라 광무 중원 2년
○겨울 10월 신라왕 유리(儒理)가 훙(薨)하니, 석탈해(昔脫解)가 즉위하여 왕을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이에 앞서 왕이 편찮자, 신료(臣僚)들에게 이르기를,
“탈해는 자신이 국척(國戚)에 관련되고 지위는 보신(輔臣)에 처하여,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선군(先君)의 명이 있었으니, 내가 죽은 뒤에는 그로 하여금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하여 유훈(遺訓)을 잊지 말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하후씨(夏后氏) 이래로 국가를 소유한 자가 반드시 그 아들에게 전하여 준 것은 오직 후세에 왕위를 다투는 혼란을 근심하였을 뿐 아니라, 종사(宗祀)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성(異姓)에게 전하면 혁명(革命)이라 하여 조묘(祖廟)에 혈식(血食, 희생을 올려 제사지냄)을 못하는 것이다. 남해왕(南解王)이 탈해(脫解)에게 전하려 할 때에 유리(儒理)가 서로 사양하다가는 먼저 왕위에 올랐는데, (남해가) 임종할 때에 명한 것[亂命]을 좇아서 마침내 탈해에게 전하였으니, 그는 몹시 가볍고 중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만약 ‘비록 다른 성(姓)에게 전하여도 조묘(祖廟)는 오히려 남아 있다.’고 말할진대, 신(神)은 진실로 동족(同族)이 아닌 데에는 흠향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을 혈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요(堯)와 순(舜)이 선위(禪位)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요와 순의 선위는 천하를 공변되게 여겨 천하를 위하여 적합한 사람을 얻은 것인데, 남해가 아들이나 사위에게 전한 것은 국가를 사사로이 여겨 아들과 사위의 가볍고 중한 것을 분간하지 않고 전하려 한 것이니, 어찌 감히 요순의 일을 빌어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첨이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제왕(帝王)이 서로 계승(繼承)하는 순서를 모두 한 성(姓)이 서로 전하는 것으로써 법을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처음 천하를 둠에 약속하기를, ‘유씨(劉氏)가 아니고 왕(王) 노릇 하는 자는 천하가 함께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실(新室,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나라)의 말엽에 광무(光武)가 중흥(中興)하였고, 한나라가 또 쇠퇴하기에 이르러서 비록 천하가 분열되었으나, 유비(劉備)는 오히려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라는 것으로써 삼국(三國)의 정통(正統)을 삼았는데, 신라의 전한 계통은 그렇지 않다. 남해왕(南解王) 박씨(朴氏)가 훙(薨)하려 할 때에 그 아들 유리(儒理)와 그 사위 석탈해(昔脫解)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으로 세우라.’ 하였기 때문에, 탈해왕이 유리왕의 뒤를 계승하였고, 7세(世)에 와서 조분왕(助賁王)은 내해왕(奈解王)의 유명(遺命)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조분왕에서 2세를 지나 미추왕(味鄒王) 김씨(金氏)는 조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었다. 무릇 세 번이나 성을 바꾸었는데, 전수(傳受)할 때는 먼저 선왕의 유훈(遺訓)을 외어서 하늘에서 받은 부명(符命)으로 삼아 대략 의심하고 꺼리는 말이 없었으므로, 1천 년의 유구한 왕업(王業)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한 지방에서 나라를 전하는 가법(家法)에 그쳤을 뿐이니, 천하와 더불어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시황(始皇)이 왕위에 올랐으나 진(秦)의 국운(國運)은 이미 멸망되었고, 원제(元帝)가 왕위에 올랐으나 진(晉)나라 종사(宗祀) 또한 끊긴 것이니, 어떻게 하면 여가(呂家)가 영가(○家)를 계승하며, 우가(牛家)가 사마가(司馬家)를 계승한단 말입니까? 비록 (한 왕조(王朝)의) 대(代)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옳겠습니다. 그런데 유독 애석하게도 당시에는 솔직하게 써 놓은 것이 없으며, 후세에는 그전 것을 그대로 따르기만 좋아하여 모두 진(秦)·진(晉)으로 썼으니, 그 실상을 논한다면 한(漢)·송(宋)이 일어나기 전에 진(秦)·진(晉)은 이미 멸망하였습니다. 남해(南解)의 유교(遺敎)로 박씨(朴氏)와 석씨(昔氏)가 나이의 순서로써 승습(承襲)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신기(神器)를 경솔하게 남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알지 못한 것으로서, 석씨가 일어나면 박씨를 제사지내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구나 남해의 고명(顧命)은 요(堯)가 선위하여 순(舜)이 받고, 순이 선위하여 우(禹)가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한때의 고식적인 은혜에서 나온 것으로 국가 만세(萬世)의 대계(大計)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유리(儒理)는 아버지의 임종할 때의 명을 따라 탈해(脫解)와 서로 사양하면서 일찍이 판단하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그 귀결점을 상고하여 보면 연(燕)나라 쾌(○)의 양위(讓位)1)와도 또한 얼마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에 겨우 왕위를 잇게 되었다가 내일에는 석씨의 소유가 되어 비록 한두 대(代) 전위(傳位)하였으나 박씨가 또 일어나고, 또 한두 대 전위하였다가 김씨가 대신 일어났으므로, 신라의 역년(歷年) 1천 년 사이에 세 성(姓)이 서로 전하여 박씨가 왕이 된 것이 10인이고, 석씨가 왕이 된 것이 8인이며, 김씨가 왕이 된 것이 38인이니, 이는 신라가 김씨의 신라요, 박씨와 석씨의 신라가 아닙니다. 어찌 남해의 임종할 때에 명한 것과 유리의 처사가 마땅함을 얻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주
1)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연왕(燕王) 쾌(○)가 정승 자지(子之)를 신임하여 나라를 그에게 맡겨 왕사(王事)를 행하게 하였으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마침내 제(齊)나라의 정벌을 받아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당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