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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丁巳年; 58)

신라 탈해왕 2, 고구려 태조왕 6, 백제 다루왕 31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계해년(癸亥年; 63)

신라 탈해왕 7, 고구려 태조왕 11, 백제 다루왕 36

한나라 명제 영평 6

 

겨울 10백제왕이 신라 낭자곡성(娘子谷城)을 침입하고 인하여 사신을 보내어 회맹(會盟)을 청하였으나, 신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년(甲子年; 64)

신라 탈해왕 8, 고구려 태조왕 12, 백제 다루왕 37

한나라 명제 영평 7

 

가을 8백제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서쪽 변방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0 (백제에서)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니, 신라가 기병(騎兵) 2천을 출동시켜 맞아 공격하여 패주(敗走)시켰다.

 

을축년(乙丑年; 65)

신라 탈해왕 9, 고구려 태조왕 13, 백제 다루왕 38

한나라 명제 영평 8

 

3신라왕이 어린아이 알지(閼智)를 얻어서 길러 아들로 삼았다. 왕이 밤에 금성(金星) 서쪽 시림(始林) 사이에서 닭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금빛 나는 조그마한 독(○)이 나뭇가지에 걸렸고 흰 닭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아뢰니, 왕이 사람을 시켜 독을 가져다 열게 하였는데,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있고 모습이 기위(奇偉)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복으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알지(閼智)’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방언[鄕言]에 어린아이의 호칭이다.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은 김씨(金氏)라 하고, 닭의 괴이한 일이 있음으로 해서 시림(始林)을 고쳐 계림(鷄林)’으로 이름하였으며, 인하여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았다.

 

[권근이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유행(流行)하여 만물이 화생(化生)하고 재배(栽培)되었다가 경복(傾覆)될 뿐인데, 어찌 금궤(金櫃)에 아이를 담아 숲 속에 내려놓고 닭이 울어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있단 말인가? 어찌 간사한 사람이, 왕이 태어날 때 신이(神異)하였음으로써 나라를 얻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또한 그 아들을 신이하게 만들어 세워 후사로 삼아서 사술(詐術)을 행하여 나라를 도둑질하기를 황헐(黃歇)1)·여불위(呂不韋)2)의 과실과 같이 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왕은 곧 금궤와 흰 닭에 현혹되어 그를 신비하게 여겨서 길러 아들로 삼고, 또 국호(國號)를 고쳐서 드디어 이성(異姓)의 애매한 후예(後裔)로 하여금 그 국가를 두게 하여, 남해(南解)는 이미 앞에서 실수하고 탈해(脫解)는 또 뒤에 와서 실수하였으니, 그 지혜롭지 못함이 심하였다.” 하였다.

 

각주

1) 황헐(黃歇): 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2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었으며, 춘신군(春申君)에 봉해짐. 일찍이 이원(李園)의 누이에게 장가들었는데, 임신했다는 것을 알면서 당시 아들이 없던 고열왕(考烈王)에게 바쳐 남자 아이를 낳자 그를 태자로 삼고 이원의 누이를 후()로 삼았음. 왕이 졸()하고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가 유왕(幽王). 뒤에 이원이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황헐을 죽였음.

2) 여불위(呂不韋): ()나라 사람으로,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기 전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계책을 세워 귀국시켰으므로, 뒤에 재상이 되었으며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음. 일찍이 한단(邯鄲)의 미희(美姬)를 들여 잉태하자, 장양왕에게 바쳐 아들 정()을 낳으니, 이가 뒤의 진시황(秦始皇).

 

병인년(丙寅年; 66)

신라 탈해왕 10, 고구려 태조왕 14, 백제 다루왕 39

한나라 명제 영평 9

 

백제가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인을 머물러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신라가 다시 쳐서 취하였다.

 

정묘년(丁卯年; 67)

신라 탈해왕 11, 고구려 태조왕 15, 백제 다루왕 40

한나라 명제 영평 10

 

봄 정월 신라가 종척(宗戚) 박씨(朴氏)에게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군주(郡主)로 호칭하였다.

 

무진년(戊辰年; 68)

신라 탈해왕 12, 고구려 태조왕 16, 백제 다루왕 41

한나라 명제 영평 11

 

가을 8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바쳐 고구려에 항복하니,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임신년(壬申年; 72)

신라 탈해왕 16, 고구려 태조왕 20, 백제 다루왕 45

한나라 명제 영평 15

 

2 고구려가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쳐서 그 왕을 사로잡았다.

 

계유년(癸酉年; 73)

신라 탈해왕 17, 고구려 태조왕 21, 백제 다루왕 46

한나라 명제 영평 16

 

여름 5 ()가 신라의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하니, 왕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갑술년(甲戌年; 74)

신라 탈해왕 18, 고구려 태조왕 22, 백제 다루왕 47

한나라 명제 영평 17

 

가을 8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니,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막았다.

 

겨울 10 고구려가 환나부(桓那部)의 패자(沛者) 설유(薛儒)를 보내어 주나(朱那)를 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

 

을해년(乙亥年; 75)

신라 탈해왕 19, 고구려 태조왕 23, 백제 다루왕 48

한나라 명제 영평 18

 

겨울 10 백제가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병자년(丙子年; 76)

신라 탈해왕 20, 고구려 태조왕 24, 백제 다루왕 49

한나라 장제(章帝) 건초(建初) 원년

 

가을 9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쳐서 와산성(蛙山城)을 다시 취하고, 백제의 수비(守備)하고 있던 2백여 인을 섬멸하였다.

 

정축년(丁丑年; 77)

신라 탈해왕 21, 고구려 태조왕 25, 백제 다루왕 50·기루왕 원년

한나라 장제 건초 2

 

가을 8 신라의 아찬(阿飡) 길문(吉門)이 가야(加耶)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귀에서 싸워 1천여 급()을 참획(斬獲)하였다. 길문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삼았다.

 

가을 9 백제왕 다루(多婁)가 훙()하고 태자 기루(己婁)가 즉위하였다.

 

겨울 10 부여(扶餘)에서 뿔 셋이 난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고구려에 바치니, 왕이 상서롭다고 하여 대사(大赦)하였다.

 

[이첨이 말하기를,]

시대가 화평하고 풍년이 드는 것이 가장 상서로운 것이다. 진실로 그렇지 못하면 비록 하늘에서 감로(甘露)가 내리고 땅에서 예천(醴泉)이 솟아난다 하더라도 상서로움이 되지 못하는데, 더구나 동물이 정상에 반()하는 것이겠는가? 무릇 사슴과 토끼는 택지(澤地)에 살면서 달아나고 굴에 살면서 엎드리어 있으니, 음물(陰物)의 종류이다. 이제 뿔이 셋이고 꼬리가 긴 것은 음도(陰道)가 극에 달하여 상도(常道)를 변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요물(妖物)이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태조왕(太祖王)이 나라를 향유한 지 오래긴 하였으나 마침내 두 아들의 화()를 빚어냈으니, 이것이 어찌 길조이었겠는가? 그 후에 붉은 노루와 붉은 표범을 얻는 것이 또한 다스리는 도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태조왕은 이것으로써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하여 재앙을 멈추게 하지 않고 도리어 상서롭게 여겨 곧 경내(境內)에 사유(赦宥)한 것은 자못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79)

신라 탈해왕 23, 고구려 태조왕 27, 백제 기루왕 3

한나라 장제 건초 4

 

신라가 간시산(干尸山)과 거칠산(居漆山)의 두 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처음에 두 나라가 이웃 경계에 있으면서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었다. 신라에서 거도(居道)를 명하여 변방의 관원을 삼았는데, 거도가 두 나라를 병탄(幷呑)하려는 뜻을 두고 항상 장토야(張吐野)에 뭇말을 모으고 날마다 병사로 하여금 달리는 놀이를 하게 하면서 말타기 재주를 하는 것이다.’라고 칭하였다. 두 나라 사람은 이를 익히 보고도 심상히 여겨 대비하지 않으니, 이에 군사를 일으켜 멸한 것이다.

 

경진년(庚辰年; 80)

신라 탈해왕 24·파사왕 원년, 고구려 태조왕 28, 백제 기루왕 4

한나라 장제 건초 5

 

가을 8신라왕 탈해(脫解)가 훙()하니,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고,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 파사(婆娑)가 즉위하였다.

 

임오년(壬午年; 82)

신라 파사왕 3, 고구려 태조왕 30, 백제 기루왕 6

한나라 장제 건초 7

 

봄 정월 신라에서 영()을 내리기를,

지금 창름(倉○)이 텅 비고 병기(兵器)가 무디어졌으니, 혹 홍수와 가뭄의 재해나 변방의 경보(警報)가 있게 되면 어떻게 이를 방어하겠는가?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병혁(兵革)을 단련하여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84)

신라 파사왕 5, 고구려 태조왕 32, 백제 기루왕 8

한나라 장제 원화(元和) 원년

 

신라에 큰 풍년이 들어 길을 가는 자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정해년(丁亥年; 87)

신라 파사왕 8, 고구려 태조왕 35, 백제 기루왕 11

한나라 장제 장화(章和) 원년

 

가을 7 신라에서 영을 내리기를,

국가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加耶)와 인접하였는데, ()이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인국(隣國)을 두려워하게 하지 못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보수하여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도록 하라.”

하니, 이에 가소(加召마두(馬頭) 두 성을 쌓았다.

 

경인년(庚寅年; 90)

신라 파사왕 11, 고구려 태조왕 38, 백제 기루왕 14

한나라 화제(和帝) 영원(永元) 2

 

가을 7 신라가 10인을 나누어 보내 주주(州主군주(郡主)를 염찰(廉察)하게 하여, 직사(職事)를 부지런히 하지 않아 전야(田野)를 많이 황무(荒蕪)하게 한 자는 내치도록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93)

신라 파사왕 14, 고구려 태조왕 41, 백제 기루왕 17

한나라 화제 영원 5

 

2 신라왕이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행행(行幸)하여 나이 많은 이를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 주었다.

 

갑오년(甲午年; 94)

신라 파사왕 15, 고구려 태조왕 42, 백제 기루왕 18

한나라 화제 영원 6

 

2 가야(加耶)의 군사가 신라의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니, 신라가 아찬(阿飡) 길원(吉元)을 보내어 기병(騎兵) 1천을 거느리고 쳐서 패주(敗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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