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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癸巳年; 153)

신라 일성왕 20, 고구려 차대왕 8, 백제 개루왕 26

한나라 환제 영흥(永興) 원년

 

겨울 10신라의 궁문(宮門)에 화재가 났다. 혜성(彗星)이 동방(東方)에 나타났다가 또 동북방(東北方)에 나타났다.

 

갑오년(甲午年; 154)

신라 일성왕 21·아달라왕 원년, 고구려 차대왕 9, 백제 개루왕 27

한나라 환제 영흥 2

 

2신라왕 일성(逸聖)이 훙()하고, 맏아들 아달라(阿達羅)가 즉위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5)

신라 아달라왕 2, 고구려 차대왕 10, 백제 개루왕 28

한나라 환제 영수(永壽) 원년

 

겨울 10신라의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모반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하였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어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였다. 백제의 여러 성이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지키므로, 신라의 군사는 군량이 떨어져서 곧 돌아왔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거복(?僕, (?) 땅 기공(紀公)의 아들)이 노()나라로 도망 왔을 때 계문자(季文子)가 말하기를, ‘임금에게 예의가 있던 자를 보면 임금 섬기기를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같이 하였고, 임금에게 무례하게 한 자를 보면 주륙(誅戮)하기를,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같이 하였는데, 지금 거복을 보건대 착한 것에 처하지 못하고 흉덕(凶德)에 있으니, 이 때문에 그를 버린 것이다.’ 하였다. 지금 길선(吉宣) 또한 간악한 도적인데도 백제왕이 받아들여 숨겨 주었으니, 이는 도적을 엄폐(掩蔽)하여 감추어 준 것이다. 이 때문에 이웃 나라와 화친(和親)를 잃게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싸움[兵革]에 괴로움을 당하게 하니, 그 밝지 못함이 심각한 것이다.” 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7)

신라 아달라왕 4, 고구려 차대왕 12, 백제 개루왕 30

한나라 환제 영수 3

 

신라에서 영일현(迎日縣)을 두었다. 처음 동해(東海) 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迎烏)라 하고 처()는 세오(細烏)라 하였다. 하루는 영오가 바닷가에서 마름[]을 채취하다가 문득 표류하여 일본국(日本國)의 조그마한 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세오가 그 남편을 찾아 또 표류하여 그 나라에 이르러 왕비가 되었는데, 당시에 영오와 세오를 일월(日月)의 정기(精氣)라 하여 이때에 이르러 현()을 설치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5)

신라 아달라왕 12, 고구려 차대왕 20·신대왕 원년, 백제 개루왕 38

한나라 환제 연희(延熹) 8

 

3 고구려 전왕(前王) (, 태조왕(太祖王))이 별궁(別宮)에서 훙()하였는데, 나이가 119세였다.

 

겨울 10 고구려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가 그 왕 수성(遂成)을 시해하고 왕의 아우 백고(伯固)를 왕위에 세웠다. 처음에 수성이 무도(無道)하므로, 백고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하였었는데, 명림답부가 연나 조의(?那?衣)가 되어 백성들이 참지 못함으로 인하여 수성을 시해하였다. 이에 좌보(左輔) 어지류(?支留)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의논하고 사람을 보내어 백고를 맞이하였는데, 그가 도착하자, 어지류가 옥새(玉璽)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선군(先君)이 비록 아들이 있으나 (왕위(王位)) 감당해 낼 수 없고, 하늘과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어진 분에게 돌아갔으니, 청컨대 존위(尊位)에 나아가소서.”

하니, 백고가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77세였다. 수성의 호()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6)

신라 아달라왕 13, 고구려 신대왕 2, 백제 개루왕 39·초고왕 원년

한나라 환제 연희 9

 

봄 정월

고구려왕이 영()을 내리기를,

과인이 왕친(王親)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이 없었다. 지난날 형제 사이에 정권을 위촉한 것은 자못 자손에게 전하는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멀리 떠나 숨어 있다가 흉보(凶報)를 듣기에 이르러 다만 몹시 슬퍼할 뿐이었는데, 어찌 백성이 즐거이 추대하고 군공(群公)이 나오기를 권할 줄이야 생각하였겠는가? 그릇되게도 내가 숭고한 자리에 앉게 되니, 감히 편안하지 못하기가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은혜를 미루어 멀리 미치게 하며 드디어 무리와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니, 국내(國內)의 죄수를 대사(大赦)하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영()을 듣고 환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난()에 차대왕(次大王)의 태자 추안(鄒安)이 도망하여 숨었다가 사령(赦令)을 듣고는 즉시 왕문(王門)에 나아가 고하기를,

지난번 나라에 화란(禍亂)이 있었을 때 신이 죽지 못하고 산골짜기로 도망갔다가 이제 새로운 정사를 듣고 감히 죄를 고합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고 저자[市朝]에 버리시더라도 오직 명령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뼈에 살을 붙여주는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하니, 왕이 곧 구산뢰(狗山瀨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내려 주고 곧 봉하여 양국군(讓國君)으로 삼았다.

 

고구려가 명림답부(明臨答夫)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승진시켜 패자(沛者)로 삼았으며, 내외 병마(兵馬)의 일을 맡게 하고, 겸하여 양맥 부락(梁貊部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보(左輔우보(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으로 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분수는 하늘과 땅 같으나,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피차의 구별 없이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법에 나라의 임금이 시역(弑逆)한 자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어 그 역적을 토벌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이 또한 그 일을 참여하여 들은 것이 되기 때문에 앞잡이의 악명(惡名)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수성(遂成)을 시해하고 백고(伯固)를 세웠는데, 백고는 처음에 산야(山野)로 도망쳐서 일찍이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한갓 자기를 세운 것이 유덕(有德)한 것으로 여길 줄만 알아서 임금을 시해한 자를 마땅히 토죄(討罪)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총애해 임용하여 국상(國相)을 삼았으니, 이는 온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모두 시역(弑逆)의 도당이 되어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인륜이 끊기게 될 것이다. 만약 백고(伯固)로 하여금 능히 대의(大義)를 펴고 사사로운 공로를 상주지 않아 시역의 죄를 밝혀서 그를 주벌하였다면, 삼강이 다시 바로잡히고 인륜이 다시 확립되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나라 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이고,1) 숙손약(叔孫?)이 수우(竪牛)를 내쫓은 것2)도 족히 나을 것이 없다 하겠지만, 백고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였다.

 

백제왕 개루(蓋婁)가 훙()하고 아들 초고(肖古)가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개루왕(蓋婁王)이 도미(都彌)의 아내가 요염하다는 것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부인의 덕은 정결(貞潔)을 으뜸으로 삼으나, 그윽하고 어두운 사람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하겠으나, 신의 아내와 같은 경우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도미를 머물러 두고 근신(近臣)을 시켜 왕이라 사칭하고 그 집에 이르러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도미와 도박을 하여 이겼다.”

 

하고 사통(私通)하려 하니, 그 아내가 옷을 갈아 입고 나오겠다고 청하고는 한 계집종을 위장(僞裝)하여 올렸다. 왕이 뒤에 속임을 당한 줄 알고는 크게 노하여 도미를 죄로 무함하여 그의 두 눈을 빼고 조그마한 배에 태워 물에 띄우고는 다시 그 아내를 끌어다가 음란한 짓을 하려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이제 남편[良人]이 이미 가고 첩()이 스스로 보존할 수 없으니, 감히 왕을 위하여 사피(辭避)하겠습니까? 다만 지금 월사(月事, 월경(月經))가 있으니, 청컨대 다른 날을 기다리소서.”

하자, 왕이 허락하므로, 그 아내가 도망하여 강구(江口)에 이르러 문득 지나가는 배를 만나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정박하니, 그 남편이 이미 먼저 가 있는지라, 드디어 같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각주

1) 정공(丁公)이 항우(項羽)의 장수로 고조(高祖, 유방(劉邦))를 팽성(彭城) 서쪽에서 급박하게 뒤쫓아 단병(短兵)으로 맞닿아 치려 하자, 고조가 서로 곤액(困厄)을 당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여 정공이 물러났는데, 항우가 멸망하기에 미쳐 정공이 고조를 알현하므로, 고조가 군중(軍中)에 두루 알리어 항우의 신하로서 불충(不忠)하여 천하를 잃게 했다.” 하고, 마침내 참살한 고사(故事).

2) 숙손약(叔孫?)은 춘추시대 노()나라 대부(大夫) 숙손표(叔孫豹)의 서자(庶子), 수우(竪牛)에 의해 숙손표의 뒤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수우가 우리 집안을 어지럽히어 적장(嫡長)을 죽이고 서자인 나를 세웠다.”고 하면서 속히 죽이려 하자, 수우가 제()나라로 도망하였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한 고사.

 

정미년(丁未年; 167)

신라 아달라왕 14, 고구려 신대왕 3, 백제 초고왕 2

한나라 환제 영강(永康) 원년

 

가을 7 백제가 군사를 잠입시켜 신라의 서쪽 변방의 두 성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남녀 1천을 노획하여 돌아갔다.

 

가을 8 신라왕이 일길찬(一吉飡) 흥선(興宣)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치게 하며, 또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이르러 닿으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노략한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청원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8)

신라 아달라왕 15, 고구려 신대왕 4, 백제 초고왕 3

한나라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

 

여름 4 ()나라의 현도군 태수(玄?郡太守) 경임(耿臨)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수백인을 죽이므로, 왕이 스스로 항복하고 현도(玄?)에 예속되기를 청원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69)

신라 아달라왕 16, 고구려 신대왕 5, 백제 초고왕 4

한나라 영제 건녕 2

 

고구려왕이 대가(大加) 우거(優居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玄?太守)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토벌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72)

신라 아달라왕 19, 고구려 신대왕 8, 백제 초고왕 7

한나라 영제 희평(熹平) 원년

 

겨울 11 ()나라 현도군 태수 경임(耿臨)이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므로, 왕이 여러 신하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편리한가를 물으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한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를 겁쟁이로 여겨 반드시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담당하여도 만 사람이 당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많지만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보내어 방어하소서

 

하니,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지금 강력한 군사로 멀리 나와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병사가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례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이 천리 길에서 군량을 운반하느라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城壘)를 높이 쌓고서 들판의 곡식을 깨끗이 수장(收藏)하여 기다린다면,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 형세가 굶주려 고생스러워 반드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강력한 군졸(軍卒)로서 육박하면 뜻대로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렇겠다고 여겨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키매, 한나라 사람이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졸(士卒)은 굶주려 고통스러워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므로, 명림답부가 기병(騎兵) 1천 인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싸워 한나라 군사를 대패시키니, 필마(匹馬)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내려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76)

신라 아달라왕 23, 고구려 신대왕 12, 백제 초고왕 11

한나라 영제 희평 5

 

고구려의 여러 신하가 태자(太子)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맏아들 발기(拔奇)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둘째 아들 남무(男武)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기미년(己未年; 179)

신라 아달라왕 26, 고구려 신대왕 15·고국천왕 원년, 백제 초고왕 14

한나라 영제 광화(光和) 2

 

가을 9 고구려의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상사(喪事)에 임하여 애통하고 7일 동안 조회(朝會)를 파하였으며, 예로써 질산(質山)에 장사지내고 묘지기[守墓] 20()를 두었다.

 

겨울 12 고구려왕 백고(伯固)가 훙()하니,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를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 태자 남무(男武)가 섰는데, 자표(姿表)가 웅장하고 훤칠하였으며 일에 임해 처결함에 있어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중도를 얻었다. 맏아들 발기(拔奇)(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더불어 각각 하호(下戶) 3만 구()를 거느리고 공손도(公孫度)에게 나아가 항복하였었는데, 뒤에 비류수(沸流水) 위에 돌아와 머물렀다.

 

경신년(庚申年; 180)

신라 아달라왕 27, 고구려 고국천왕 2, 백제 초고왕 15

한나라 영제 광화 3

 

2 고구려왕이 우씨(于氏)를 세워 후()로 삼았다. 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제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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